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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0.11.금요기도회 - 일곱을 택하라(사도행전 33)



행0601to07 - 일곱을 택하라(사도행전3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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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지난 금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음식을 나누는 일 때문에 생겨난 초대교회의 갈등은 오히려 초대교회가 더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교회 안의 갈등이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다니 말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방법을 배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커다란 위기가 될 수 있었던 갈등이 이런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셨기 때문이지만 그 일을 제대로 바라보고 가장 적절하게 반응했던 사도들의 역할 또한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문제 속에서 진짜 문제를 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급한 일 때문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소명을 소홀히 했고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소임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에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자기가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상황이 다르다고 해서 방법이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본연의 소명으로 돌아가고, 또 기도하면서 말씀이 집중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다 무릎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교만과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지 않는 태만이 자리잡고 있다면 목회자는 물론이고 교회의 중직자들, 그리고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기도라는 원리는 항상 붙들어야 할 원리인 동시에 또 다시 돌아가야할 회복과 치유를 위한 결정적인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이 감당하던 일을 내려놓고 말씀사역과 기도에 전념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업무에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생각해 낸 방법은 일곱 명의 일꾼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명의 일꾼들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생각해 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죠.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인 동시에 가장 신앙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저 사도들이 하지 못하게 된 덜 중요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위임’이었습니다. 교회를 믿고 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들이 하던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기는 그런 위임이었습니다. 위임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면 완벽하게 하실 일이지만 그런 일들을 우리들에게 맡기십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충성스럽다고 인정해 주시고, 또 신뢰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과 어떤 역할을 맡게되든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직분이나 직임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내가 얻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서 맡겨주신 것이니까요. 오늘은 교회가 처음 일꾼들을 세웠던 그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살피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직분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직분과 소임이 명예나 힘이 아니라 그저 역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직분과 소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너무 너무 귀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개인적인 명예와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라는 직분 조차도 그렇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지는 권위는 있었지만 그 권위는 절대로 특권이나 힘이 아니었습니다. 일곱명의 집사가 세워진 것 또한 교회가 커지고 복잡해 졌기 때문에 특별한 일을 맡아서 해야할 사람이 필요해서 세워진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 안에서는 직분을 자신의 권력과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입으로는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 직분을 얻기 위해서 세상의 선거판에서도 보기 힘든 부끄럽고 더러운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직분을 얻으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탈취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직분을 얻은 사람들이 과연 그 직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겸손한 모습으로 감당하게 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마치 세속적인 권력을 휘두르듯이 교회에서 자신의 직분을 남용합니다. 


우리는 직분 자체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곤 합니다만 저는 그런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직분이 영광스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영광스럽죠. 너무 너무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번째로 영광스러운 것은 그 직분을 받은 내가 아니라, 그 직분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도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영광스러운 것은 그 직분을 받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직분 자체입니다. 직분과 소임은 땅에서 행해지지만 동시에 하늘의 일이니까요. 우리가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직분과 소임 앞에서 교만한 영광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황송스러운 영광에 감사하면서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이 처음 교회를 위한 일꾼 일곱명을 세웠던 절차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사도들은 일곱명의 일꾼을 세울 때, 자신들만 모여서 결정하지 않고 모든 제자들, 그러니까 모든 성도들을 전부 모으고 그 일에 대한 동의를 구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효율을 이유로 사도들만 모여서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결코 사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성도들을 다 모아서 일꾼을 뽑는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으며 뽑혀야할 일꾼들을 선택하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것을 기뻐했으며 일곱명의 일꾼은 사도들이 아니라 성도들이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공적인 부분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게 됩니다. 우선 교회의 지도자들은 독단적인 방식으로 공적인 일들을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설득은 필요하고 동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많은 교회를 섬기면서 저는 교회 안의 갈등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대개는 일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절차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설명과 설득이 부족하니 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오해가 생겨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오해가 갈등을 만들어 내게 되구요. 설명과 설득만 충분했더라면 그런 어려움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면 나머지 모든 일들에는 항상 설명과 설득이라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설명할 수 없고 설득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일은 해서는 안되죠. 애초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일 자체에 무언가 커다란 결함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혹 좋은 일들일지라도 당장 설득이 되지 않을 때는 그런 일들은 무리하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일단 멈춰서서 천천히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래도 안되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건강한 교회라면 그 일 하나 안된다고 해서 교회가 문을 닫지는 않게 될테니까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입니다. 


사도들은 모든 성도들을 다 모으고 설명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사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쁘게 동의했으며 사도들이 제시한 올바른 기준에 따라서 일꾼들을 결정했습니다. 성도들은 이 일에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사도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사도들의 역할을 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조금은 이상한 모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자기 믿음만 잘 지키면 된다고 교회의 일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지도자들이 무엇을 하든 무관심하고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잘 되는 나라가 될 수 없듯이 성도들의 무관심한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질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은 지도자의 위치에서 해야할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고, 성도들 또한 자기 자리에서 마땅히 감당해야할 역할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른 원칙에 따라서 바르게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꼭 필요합니다. 지도자나 평신도들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몸된 교회에 무관심해서는 안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교회를 향해 그냥 당신들을 섬길 일꾼들을 택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그 일에 합당한 자격요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성령충만해야할 것. 둘째, 지혜가 충만해야 할 것. 세째,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할 것. 이 세 가지가 사도들이 제시한 조건이었습니다. 이 조건들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능력을 이야기하는 조건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하나 살피기 전에 먼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때의 성도들처럼 교회를 이루고 있고, 그 안에서 이런 저런 모양의 일꾼들을 세우기도 하고, 또 스스로 일꾼으로 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들이 제시한 일꾼을 세우기 위한 간단한 조건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교회의 일꾼으로 세울 때도, 그리고 스스로가 하나님의 일꾼다워지는 데에도 이 세 가지 기준은 굉장히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꾼은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누가 성령충만한 사람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소욕,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분명히 자신의 욕심이나 자기 생각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뜻은 관철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위한 지극히 중요한 요건입니다. 자꾸 성령충만함을 겉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모습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물론 성령충만함이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고 또 겉으로 보이는 열정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령충만함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은 내 욕심이나 내 입장, 내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가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아무리 잘해도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잘하면 잘할수록 교회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 가장 우선적으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냐 혹은 하는 일이 많으냐를 보기 전에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킬 때도 항상 이런 의미에서의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자칫하면 인간적인 자질이나 능력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혜란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수완이나 임기응변이나 혹은 빠릿빠릿한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그것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미련하고 무각감해서는 안되겠지만, 이것은 자기 앞가림을 잘 하거나 그저 일을 효율적으로 잘 처리하는 지적인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고 거기서 떠나지 않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원칙과 원리들을 현실 속으로 옮겨낼 수 있는 적절한 적용능력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이란 굉장히 범위가 큰 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 전체에 대한 좋은 평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움받을 수 있습니까? 최소한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야 할까요? 적어도 인격이나 신앙에 있어서 문제삼을만한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일꾼들을 세울 때 이 기준보다는 다른 기준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더 많습니다. 얼마나 교회에 오래 다녔느냐, 교회에서 경제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되느냐, 얼마나 많이 일하느냐, 또 나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뭐 이런 기준들 말입니다. 과연 이런 것들이 칭찬과 상관이 있을까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과 상관이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 사람 신앙은 좋은데 인격은 별로야!”라는 말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어떻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자신의 됨됨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상을 찌뿌리게 만들 수 있습니까? 물론 신앙의 초보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직 인격이 변화될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적어도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시점에서는 여전히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이란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됨됨이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정상입니다. 우리는 칭찬받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져가야 합니다. 신앙이나 인격이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다듬어 가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특히 일꾼으로 세워진 사람들의 모습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이 일꾼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납득할만한 과정과 기준에 의해서 일꾼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7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니라” 물론 이 열매는 단순히 교회가 일꾼을 세운 그 일만의 열매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경은 이 말씀을 일꾼을 세운 기록 뒤에 가져다 놓아서 이 일이 그 열매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도들과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처음 일꾼들을 세우면서 보여준 모습입니다. 가장 적절한 이유와 절차, 그리고 가장 적절한 자격요건, 그리고 그것에 따른 일꾼선출. 우리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조금은 이상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성령충만하면 부도덕해도 용서가 되고 비인격적이어도 이해하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성령충만함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성경의 성령충만은 절대로 상식이나 인격, 그리고 도덕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함이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는 더 성령충만하고 더 지혜로우며 더 칭찬받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지켜야할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과 원리들을 최선을 다해서 지켜가야 합니다. 그렇게 지극히 상식적이고 건전한 모습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부적으로도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절차나 원리에 흠잡히지 않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스스로를, 그리고 교회를 이렇게 세워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또한 더욱 더 말씀이 왕성하며 제자의 수가 많아지는 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며 우리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이 길을 가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