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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0.18. 금요기도회 -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사도행전 34)



행0608to15 -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사도행전3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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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6장 8-13절


우리가 사도행전이라는 제목만 보면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들인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님이시고 사도들은 그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다녀갔던 거의 모든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들이 교회를 세운 것 같지만 사실 교회를 세운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신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은 사도들일지라도 그 교회를 이루고 지키며 또 다른 도시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뒤에서 수고한 사람들은 성도들, 그러니까 평신도들입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이름을 내는 것은 장군일지라도 그 장군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병사들의 전투와 희생이 있어야 하듯이 사실 사도들이 사도로 일할 수 있었던 것, 그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꾼으로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러한 평신도 덕분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사도행전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제일 처음 1장과 2장 13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들과 사도들을 성령충만하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까지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기도한 것 밖에 없었으며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모두가 다 성령충만함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성령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저는 우리가 영적인 부흥과 교회 성장에 대한 단초를 여기서 얻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뜨거워지고 충만해 지는 것도,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리고 그 일이 열매를 맺게 되는 일도 모두가 다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전부 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또한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또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신앙의 하나 밖에 없는 열쇠이니까요. 그 다음 2장 14절부터 5장 42절까지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또 부흥될 때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그리고 나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는 교회내에 생겨난 갈등으로 인해서 일곱 집사로 알려진 일곱 명의 일꾼들이 세워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장 9절부터 8장 마지막절 까지는 그들 중의 두 명의 집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6장 1절부터 8절까지는 그 이전의 사도들의 이야기와 6장 9절 이후의 집사들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성령충만한 사도들과 평신도들이 만들어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간다고 할 때, 이것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교회가 은혜로워지고 또 좋은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의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는 목회자 때문에 부흥이 안된다고 하고, 목회자들은 성도들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워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래서는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목회자가 성령충만해야 한다면 성도들도 그래야 합니다. 목회자가 거룩해야 한다면 성도들도 그래야 하구요. 목회자가 뜨거워야 한다면 성도들도 그래야 합니다. 목회자가 헌신적이어야 한다면 성도들 또한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부터 8장까지의 기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가 잘 되어지는 방법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간절한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셔서 잘 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진실로 그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사도행전은 저에게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기도와 말씀사역에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리고 그게 참 많이 속상하지만 그래서 저는 이 길로 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이런다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셔서 잘 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인 여러분도 이 일에 함께 헌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우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기도 위에 우리 교회를 든든하고 아름답게 세우실 것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줄로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무엇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지 모르지만 그거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으면서 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영혼에 달게 느껴질 때까지, 그리고 그 말씀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며 능력있게 살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의 부흥을 위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저와 여러분이 한 길을 가면서 그 길에서 각자가 감당해야할 목회자요 성도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 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위한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실 것입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사장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그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로 그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며 또 말씀과 기도 위에 우리 신앙과 교회를 세워갈 때, 우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될 때, 그 때 우리 가족, 우리 친구들 중에서 제일 예수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것이 오늘 본문이 스데반 집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맨 처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권능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통해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은 그가 충만해 있었던 은혜와 권능이 겉으로 드러난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 눈 앞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면 그 일 자체나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런 일들과 그런 일들을 행하는 사람은 분명히 우리의 관심을 온통 사로잡기가 쉬우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도구이며, 그런 일들을 행하는 사람은 통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는 당사자가 된다면 그 일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드러내서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 놀라운 일의 혜택을 입을 때에는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느끼며 또 하나님을 더 온전히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 은혜와 은사 때문에 교만해지고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로 눈에 보이는 이적들에만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만 생각하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 좋은 것들은 정말 좋은 것들로써의 역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자 이것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은 이들이 시비를 건 것은 그 놀라운 일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고, 스데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8장에 가서 살펴보겠지만 스데반이 전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유대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실패와 불순종을 지적한 후에야 복음은 비로소 복음으로 들려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속에는 유대인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던 성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 또한 그들이 듣기에는 굉장히 거슬리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스데반에게 시비를 걸어온 사람들이 ‘자유인’ 그러니까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쉽게 말씀드려서 귀국한 재외동포들과 유대인 노예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이제 말년을 고국에서 보내기 위해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이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두 개의 회당을 세우고 거기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고난과 고통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주어지는 형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인 외국에서 그것도 고난스러운 삶을 살다가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온 이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서 본토의 유대인들보다도 훨씬 더 강한 집착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온 세상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그래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전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은 굉장히 남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스데반이 전해주는 성전 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곱게 들려질 리가 없었고 바로 이것 때문에 시비를 걸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흥분해서 달려들었지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조목 조목, 그리고 담대하게 이야기하는 스데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부딛힐 때는 억지만 부리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여기서 앞서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라고 하셨던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그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지혜로 이야기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할 때 의지해야할 담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복음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서 전하게 하시는 말하게 하시고 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괜히 내가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니까 당황스럽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우선은 복음으로 무장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여야 합니다. 


그런데, 논쟁에서 진 자유인들은 이번에는 스데반을 거짓으로 모함합니다. 사람들을 매수해서 그들이 공회에 가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거짓으로 고발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참 우습지 않습니까? 이들은 율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스데반과 다투고 있는 것이구요. 그런데,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하신 아홉번째 계명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어리석은 잘못입니다. 목적이 바르면 방법도 바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목적과 방법, 두 가지가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설사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목적은 너무 좋은데, 그것을 이룰 올바른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 개인의 일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즘 제가 초대교회와 처음 성도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여러분에게 이런 종류의 말씀을 자주 드리게 되는데요. 그것은 지금까지 제가 교회를 섬기면서 초대교회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많이 가슴 아팠고, 결국 그런 일들이 일으키게 되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는, 우리 광현교회에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옳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거든 담대하게 그것을 막아서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왜 그러냐고 물으시고, 안되면 안된다고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스데반은 공회로 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공회 앞에서 거짓증인들의 모함을 받고 심문을 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게 스데반을 모함한 사람들, 그리고 스데반을 심문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표정이 어땠을까요? 분명히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찼을 것이고 그 표정은 살기등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눈에 정작 그런 거짓 모함을 받고 공회 앞에 서 있는 스데반의 모습은 자신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와 같더라” 이것으 그들의 눈에 비친 스데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여러번 반복해서 공회 안의 장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다른 법정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만나곤 했습니다. 그게 어떤 광경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피고와 재판관이 뒤바뀐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항상 고소하고 재판하는 사람들은 살기등등합니다.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피고들은 정반대입니다. 전혀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습니다. 비굴함도 없습니다. 너무나 여유롭고 평온하며 얼마나 논리정연한지 모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은 재판정에 서 있는 피고의 얼굴, 그것도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죄도 없이 잡혀온 사람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얼굴에 비친 평온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기쁨과 확신이 그를 마치 천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승리자일까요? 스데반을 모함해서 공회에 잡히게 만든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모함을 받고 공회에 잡혀온 스데반일까요? 


스데반이 그런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성령과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모두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기뻐할 수 있을 때만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만족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런 상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반응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슬퍼할 수 밖에 없는데 기뻐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는데 평안하며 당황할 수 밖에 없는데 여유로우며 분노할 수 밖에 없는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 은혜 충만한 사람들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사실 승리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싸움에서 우위에 서는 것만을 승리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이런 반응들, 성령충만한 사람들만이 내놓을 수 있는 이런 반응들이 바로 진짜 승리입니다.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짓누르거나 억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강건함과 은혜로 말미암은 부요함으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삶을 꿈꾸시며 그것을 위해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언제나 두려워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으며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있는 사람들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과 은혜로 충만케 하셔서 진실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