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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22. 새벽예배 - 합당치 아니한 일을 행하였도다(창세기 68)

창2008to13 - 합당치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창6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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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0장 08-13절


예수믿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저 개인으로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공인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회 전체와 또 하나님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며 이것은 싫으나 좋으나 우리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부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또 한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소명때문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복으로 부름받았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한 복답게 살아가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더 충만한 복된 곳이 되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이 세상에는 우리 때문에 복이 더 줄어들며 사람들이 훨씬 더 살기힘든 곳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위한 복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항상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으로 부름 받았으면서도 이 세상을 위한 복이 되는 모습으로 살지 못했을 때도 있었고 그 때마다 아브라함의 주변사람들은 굉장히 곤란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비멜렉 또한 그런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잘못한 것은 아브라함인데, 그 불똥은 아비멜렉을 비롯한 그랄 땅 사람들에게 튀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복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훨씬 더 좋지 않은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또 이 세상모두에게 말입니다. 


아침이 밝자 마자 허겁지겁 자신을 찾아와 자신에게 우선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따지는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대는 첫번째 핑계는 ‘그랄 땅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랄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랄 땅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굉장히 두려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어떤 뜻으로 보든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아브라함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지레짐작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던 것은 바로 이 지레짐작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예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 살게 되는지 그 이유들 중의 하나를 알려줍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예수믿는 우리를 향해 호의적이지 않을 때가 더 많고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치게 악하게 생각하기 쉽고,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자꾸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이루는데 실패하게 되고, 그래서 세상은 우리 덕에 덧입어야 할 복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레짐작으로 아주 악한 거짓말을 지어내어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동안 자신이 반복해서 저질러 왔던 똑같은 악행에 대해서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두번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번 거짓말은 지금까지 해 온 똑같은 거짓말과 똑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말을 하는 중간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라” 여러분, 이것이 진짜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근친혼도 굉장히 흔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누이였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아내입니다. 관계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제는 아내를 팔아서 자기 목숨을 구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아내를 보호해야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도 핑계라고 그렇게 자신의 비열한 거짓말, 아니 거짓말보다 더 나쁜 진실을 그렇게 합리화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게 되면 그 죄가 거의 항상 끌어들이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리화라는 죄입니다. 그런데 실은 원래 처음에 지은 죄보다 더 나쁜 것이 바로 이 자기 합리화라는 죄입니다. 그것은 죄를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며 죄를 지은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법정에서도 피고가 이렇게 하면 정상참작이 없습니다. 더 중한 벌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죄가 죄인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일조차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핑계를 대고 자기를 합리화 하기 시작하면 죄는 더 이상 죄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선택, 필연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분명히 고의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 잘못을 합리화하지 말로 하나님께는 죄사함을 구하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죄가 더 악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죄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 또한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분명히 지레짐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피해의식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싸울 의지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의 결과에 대해서 지레짐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머리로 미리 계산하지 말고  상황에 대해서 단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살아보면 그런 지레짐작이 맞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레짐작으로 결정한 일이 나를 굉장히 난감하게 만들 때도 있고 반대로 정말 신앙적인 모험을 감행했던 일이 너무나 좋은 열매로 돌아오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해 보지 않은 일,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옳지 않은 선택을 할 수가 있으니까요.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합리화하지 말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책임을 지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죄가 나에게도 그렇고 이 세상에도 더 이상의 악한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항상 지레짐작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며, 죄를 합리화하지 말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서 이 세상을 향한 복으로 부름받은 소명을 이루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