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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0.25. 금요기도회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사도행전 35)



행0701to08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사도행전35).pdf


20131025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7장 01-08절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시기를 받게 되었고 또 무고하게 모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유민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람을 사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들었다고 거짓으로 고소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12절 이하를 보면 이 죄목이 성전과 율법에 대한 것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고, 율법은 모세가 가져다 준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는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 고소를 받고 공회로 끌려온 스데반에게 대제사장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어디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이 질문 뒤에 이어지는 7장 53절까지 이어지는 디모데의 설교는 일단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공회원들을 향한 복음전도이기도 했고, 또 사도행전 전체로 보아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설교이기도 합니다. 


법정 자체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법정에서의 스데반의 행동 또한 이전의 베드로를 많이 닮아있습니다. 베드로도 심문에 답하면서 그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는데, 스데반 또한 자신을 억울하게 잡아온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대목입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이렇게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 좋은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성령충만하게 하셔서 베드로처럼, 그리고 스데반처럼 담대하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시기를, 그런 결단이 있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스데반이 그런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지만 스데반이 그 공회 안의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은 더욱 더 놀랍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부형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형제들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버지라고 비슷하거나 조금 위아래 연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잡아먹겠다고 잡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서 아버지와 형제들, 그러니까 나의 가족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이것이 스데반이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더 위험해 질 것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스데반에게 있어서 그들은 여전히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할 자기 형제와 가족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복음 안에 사랑의 비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가장 절실하게 복음이 필요한 사람일까요? 아마도 자기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제일 위험해질 사람이 바로 바로 그런 사람이니까요. 


복음은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복음은 그 복음을 누가 가장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나를 박대하고 하나님을 향해 죄를 많이 지으면 많이 지을수록 그 사람이 더 불쌍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게 만듭니다. 박해자와 모함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럼 없이 ‘형제들‘이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스데반을 통해 이것을 깨닫게 되면서 저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을 온전히 복음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 복음을 전해줄 정도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해결책을 하나 얻은 것 같아 참 기뻤습니다. 내가 복음이라는 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더 큰 죄인일수록 더 절실하게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앞서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영혼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리고 그런 그에게도 복음을 전해줄 수 있겠죠. 


저는 이제 기도하면서 이 연습을 해 보려고 합니다. 복음의 안경을 통해 사람들을 바라보는 연습 말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 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보셨기 때문에 그 분에게는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그렇게 스스럼 없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함께 이 연습을 하셨으면 합니다. 나의 눈이나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연습, 주님의 눈으로 영혼을 보는 연습을 함께 시작하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연습을 시키시고, 또  복음 때문에 우리 안에서 스데반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요약해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가셨고,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세우셨고 그렇게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브라함이라는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여러분이 궁금해 하실 수 있겠다 싶어서 먼저 본문에서 이상한 것 하나를 설명해 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가만히 보면 아무리 보아도 스데반의 이야기는 창세기와는 다릅니다. 창세기 12장으로 가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 말씀하셨던 것은 하란으로 되어 있습니다. 메소보다미아 그러니까 갈데아 우르에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스데반이 잘못 알고 실수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12절에서 사용한 “이르시되”라는 대개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 말이 과거에 이미 끝난 일, 그러니까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었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12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록한 것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말씀하신 것에 그제서야 순종하고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이 본문의 진짜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5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고, 여호수와 24장 3절, 그리고 느헤미야 9장 7절 또한 똑같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스데반이 틀리지 않았고, 사도행전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렇게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메소보다미아 그러니까 정확하게 갈데아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몰랐던 때입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갈데아 사람들이 섬기던 신을 함께 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크게 틀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초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에게 변함없이 들려주는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 그리고 10절로 가서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은즉...”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우리 안에 믿음의 씨앗이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어서 결코 하나님을 알 수도, 또 하나님께로 갈 수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죽음에 내어주시는 댓가를  치르시고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줄도 모를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어마 어마한 댓가를 치르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은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자꾸 은혜가 아닌 행위로 기울기 쉬운 우리들에게 이 야이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지혜롭게 선택된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겼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 말씀을 이루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곧바로 보여주실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란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습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와 그 바깥 세상과의 경계선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떠나기는 떠났지만 자기 고향을 떠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랬습니까? 아버지인 데라가 죽을 때까지였습니다. 아마도 그 때까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란을 떠난 것이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때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이제까지 해 온 아브라함 설교들이 다 고쳐져야 할 판입니다. 사실 그래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왔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로 옮기셨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아브라함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결단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게 하시고는 그를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셨습니다. 


구원은 그 시작도 그렇지만 과정에 있어서도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어져 갑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구원이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도 우리가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믿으려는 의지가 강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문득 문득 “하나님이 나같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처럼 변덕장이였다면, 나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쉬운 분이시라면, 그리고 참을성 없는 분이라면 나는 진직에 내침을 당했을 것이고, 죽어도 수만번 죽었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수많은 불순종, 수많은 범죄와 반복되는 게으름과 영적인 무감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제가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뭐 크게 생기는 것도 없는 이런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다니 저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데리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정말 큰 실수 없이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참으심, 그리고 변치 않는 신실하심이 없었다면 저는 오히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지금도 부족하고 미숙하기 그지 없는 저를 사용하고 계시니 이것이 저에게는 기적 중의 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만 그렇지 않죠?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 아니었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불순종하고 머뭇거리는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옮기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고집세고 게으르기까지 한 우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가실 것입니다. 항상 스스로를 바라보며 낙심될 때마다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스데반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굉장히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자식도 없는데 자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그 자손들은 다른 나라의 종이 되어 사 백년을 괴롭힘을 당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스데반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우리가 이 구절을 4장 마지막 부분과 함께 읽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겼느니라” 자손들은 커녕 자식 하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 자손들이 400년동안 종노릇을 한 후에야 이 땅이 네 자손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지금 그 후손인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들은 애굽에서 400년 넘는 세월을 종노릇했지만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말입니다. 


원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은 구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출애굽의 완성, 그러니까 구원의 완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순종하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을 넘어서 결국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법정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 때 유대 땅에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누가 완성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한 번 하신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넘기 불가능한 장벽이 있어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장애가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벽을 허무시고 그 장애를 넘으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백성됨이 할례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표시로, 또 그 약속을 이루어가 실 것이라는 표시로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압니다. 그것이 스데반이 이스라엘 구원 이야기의 시작이자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 할 필요가 없을까요? 우리가 왜 스스로 구원얻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고행을 하거나 뼈를 깎는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것은 구원은 그것을 계획하고 약속하며 진행하고 또 이루어가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완전히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믿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갔던 부자청년처럼 항상 구원에 대해서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붙들었고 또 율법을 붙들었으며 성전에 매달렸습니다. 정작 그 모든 것들을 주시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구원의 참된 길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지는 않으면서 말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붙들고 그 분 안에 거하면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로 걸으면서 말입니다. 그 길에서 다른 것을 붙들거나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엇도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어 가시며 완성하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 약한 믿음 때문에 낙심되어도 계속해서 하나님만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까지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