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25. 새벽예배 -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창세기 71)


창2108to13 -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창71).pdf


20131024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1장 08-13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모든 죄의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며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또 그렇게 한 번 열린 길은 때로 우리가 다시 죄를 짓고 그 길이 좁아진다고 해도 다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다시 활짝 열려지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일어나게 할 수 없는 놀랍고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이 바로 이 일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고 또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 그 형벌에서 면제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로 인해 생겨난 좋지 않은 결과들에서까지 언제나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치 땅에 심겨지는 씨앗처럼 이 세상에 악한 열매들, 쓴 열매들을 남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은 씨앗의 쓴 열매들을 우리가 다 감당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열매들을 우리가 다 피하거나 면제받을 수는 없고,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짐으로 우리에게 되돌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때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단지 100세에 아들을 얻기만 해도 그 기쁨이 이루말할 수 없을텐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받게 되었으니 아브라함과 사라의 느꼈던 영혼의 기쁨은 얼마나 더 크고 또 컸겠습니까? 이삭이 사라의 품에 안겨 젖을 빨 때마다 그것을 지켜보는 두 사람의 기쁨과 만족은 아마도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꿈같은 세월이 흘러 이삭이 젖을 떼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 2년이나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고, 그 동안 이삭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풍습에 따라서 이삭이 완전히 젖을 떼는 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정말 모두가 다 즐거워 하는 날이었죠. 그런데, 이 날이 가장 불행한 날로 여겨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어쨌든 아브라함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제대로 장자로 대접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사라가 아닌 하갈이 낳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태어나고 자란 데에는 그의 잘못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하갈의 잘못도 아니죠. 그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서자로 태어났고, 그 나마도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더욱 더 천덕꾸러기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눈에 젖을 뗀다고 온동네 떠나갈 듯이 잔치를 벌이는 그 모습이 기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찬치 때문에 어수선한 틈을 타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이 괴롭힘의 정도가 꽤나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사라가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곧바로 아브라함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것을 그냥 보고하지 않았고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아마 그 이전에도 사라는 수차례 그런 요구를 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얼르고 달래서 넘기고 또 넘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이스마엘이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심하게 괴롭힌 상황이 발생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가장 기뻐해야 할 잔치날은 아브라함에게는 가장 고민스럽고 고통스러운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흔들릴 때 행한 잘못된 선택의 열매는 아브라함이 가장 기뻐해야할 그 날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식과 그 어미를 내쫓아야 할 안타까운 상황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불신앙 자체는 용서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까지 다 제거해 주시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또 사라는 어떻습니까? 사라는 비록 그 일이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눈엣 가시처럼 여기다가 둘을 내어쫓으라는 비인간적인 요구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이스마엘로 인해서 사라의 마음이 얼마나 망가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민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이지만 아마도 이 말씀을 듣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진작 믿었더라면 이런 고민도 이런 고통도 없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 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라의 말대로 따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으니 이제는 제고의 여지도 없어진 셈입니다. 그렇게 상심해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을 위로하시고 이스마엘도 살게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은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 마음대로 낳은 자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가 아브라함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에게도 커다란 민족이 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실 나중 이야기이지만 겉으로만 보면, 또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이스마엘 자손들이 이삭의 자손들보다도 더 많은 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뿌린 잘못된 씨앗의 열매는 줄여주시고, 좋은 씨앗의 열매는 더 많아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선하심과 인자하심 덕분에 그래도 우리의 삶이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세워져 있는 것이고,  또 항상 우리가 행한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선한 결정,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결정을 내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도 불쑥 불쑥 끼어드는 쓴 열매들을 더 줄여나가면서 더 순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결정은 우리에게서 나가서 하나님께로 갔다가 어떤 모양으로건 우리에게로 되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고 항상 좋은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쓴 열매가 맺혀지지 않을 씨앗, 그래서 누구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씨앗을 심으시기 위해서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달고 시원한 열매로 삶을 채워가고 또 이 세상을 더 풍성하고 복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