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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0.27. 주일오전 -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49)



막1028to31 -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49).pdf


20131027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28-31절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읽다가 문득 저희 집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있었던 일화가 생각나서 얼굴에 빙긋이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그 때 일을 적어놓았던 글이 있어서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대구에 있는 대구동부교회의 부목사입니다.

여기 온지 이제 만 3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큰 놈은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제법 컸는지 가끔 질문이 날카롭기도 합니다.


오늘은 저녁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묻더군요.


"아빠, 아빠는 언제 담임목사 돼?"

대답하기가 난감했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아내가 말했습니다. 

"너 담임목사가 뭔지 알아?"

큰 놈이 대답했습니다. 

"응,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이야."

그래서 물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줬어?"

"그냥 내가 생각해서 알았어."

“오! 표현력이 참 좋은데."

이렇게 칭찬하니 옆에 있던 작은 놈이 뭐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잘 못들었지만 아내는 듣고 막 웃었습니다. 

아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대며 말했습니다.

"자기는 생쥐를 안대."

그랬더니 작은 놈이 또 말합니다. 

"난 애기 때부터 생쥐 알았는데...." 


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뜬금없이 생쥐냐구요?

어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다가 '쥐새끼'라는 말을 썼더니

둘째가 대뜸

"어, 아빠 욕 썼다."

그래서 내가 왜 쥐새끼가 욕이냐고 했더니 

"쥐새끼가 뭐야, 생쥐지."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더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새끼는 분명히 욕이니까요.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서 칭찬을 해 주었더랬습니다. 

오늘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형이 뭐 안다고 칭찬받으니 자기도 칭찬이 궁했나 봅니다. 


아무튼

애들의 시샘과 엉뚱함이란.....

참 재미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꼭 그 때 저희 집 둘째 아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문제를 들고 찾아온 부자에게 영생을 위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돈을 섬기는 인생을 살지 말고 그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를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보통사람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탄하셨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절망 섞인 탄식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비록 자기들은 낙타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스스로 실이 되어 있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 이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신있게 예수님의 주의까지 환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꽤나 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저희 집 둘째 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야기 속에는 그런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 말고도 한 가지 마음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렇게 했으니 우리에게 주어질 댓가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의 국가로 세우실 때, 그 때 한 자리 얻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전에도 그것 때문에 다투었지만 머지 않아 또 다시 다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겉으로는 다 버린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전혀 버린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며,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으니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느냐고,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자격이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낙타가 실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여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정반대로 알아듣고서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누군가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사람 스스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변화시키셔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신앙과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추고, 은혜를 받을 자격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자격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 안에는 없는 단어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공로를 세우든 그것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은 아얘 출발조차 하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격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될까요?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분이시니 만약 우리에게 자격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완전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면에서든 절대로 완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자격이 아니며,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자격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자격이라는 단어를 모두 지워버리고 그대신 은혜라는 단어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을 때, 우리는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란 그저 모든 것들을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변화도 은혜고 희생도 은혜고 섬김도 은혜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은혜고 거기서 상급을 얻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조건이 있지 않느냐구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 조건조차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조건조차도 우리에게 허락하실 의무가 없으셨으니까요. 이제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자격’과 ‘공로’라는 말을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은혜’라는 말을 적어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그것만 생각하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가 또 나왔죠? 다른 말씀들도 그렇지만 이 말씀만큼은 예수님이 철저하게 보증하신다는 뜻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말씀하시고 또 보증하신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서는 참 믿기 힘든, 정말 현실성이 없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것은 바로 ‘백 배’라는 말 때문 입니다. 


집에 전단지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백만원만 투자하시면 천만원으로 돌려드립니다.”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약속을 믿고 투자하시겠습니까? 그러실리가 없죠.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백만원만 투자하시면 1억으로 돌려드립니다. 진짭니다. 확실히 보장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게다가 이게 하늘나라에 가서 그렇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라면 그래도 조금 신빙성이 있겠지만 주님은 분명히 ‘현세에…’라고 단서를 붙이십니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주님의 말씀을 믿기가 더 어렵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이 약속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약속입니다. 집과 땅은 백 배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을 백 배나 받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저는 아들만 200명이 되고, 아내만 100명이 되는데요.  자식과 아내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렇지 어떻게 다 데리고 삽니까? 게다가 자식이 속을 썩이는 분들, 남편이나 아내가 웬수같은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정말 이것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으악!’ 아닙니까? 이렇게 되게 해 주신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을 뿐더러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정말 말 그대로 난리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라면 차라리 그냥 이대로 살아가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집하고 땅만 백 배로 되돌려 주신다면 그건 슬쩍 모르는 척 받고서 말입니다. 


저는 오래전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이 약속 때문에 한참을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말씀에 대한 해답을 다른 곳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바로 사도행전의 맨앞부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후에 사도들과 성도들은 복음을 들고 거리로 나가 정말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살았던 모습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묶으시자 그들은 더 이상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모두가 다 진심으로 친 가족보다도 더 사랑하는 하늘가족들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그들은 모두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것이 모두의 것이 됩니다. 아니 아얘 누구의 것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 집이 백 개구요. 전토가 백 배가 됩니다. 실제로 나중에 사도들은 다른 도시들로 전도여행을 다닐 때,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의 집에 머물면서 그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면 사실 초대교회의 선교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현세에’ 다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아는 권사님으로 부터 문의를 하나 받았습니다. 문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그 분의 남동생이 다니는 교회가 괜챦은 교회인지 판단을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요, 제가 오늘 드리려는 말씀은 바로 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 교회가 생겨나게 된 연유는 이랬습니다. 여러분도 C.C.C.의 김준곤 목사님을 아실 겁니다. 이 교회를 세우신 목사님은 원래 김준곤 목사님과 초창기에 C.C.C.를 세웠던 분이신데, 중간에 이런 저런 이유로 그 곳을 나오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을 존경하던 학생들이 목사님을 따라 나와서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의 그 교회가 된 것입니다. 들어보니 그 목사님은 침례교 목사님이셨습니다. 물론 지금 그 교회는 교단이 없는 독립교회이지만요. 제가 들어보니 그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고 계신 한, 특별히 문제삼을 것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나누는 중에 그 교회에 대한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그 목사님께서는 인격도 너무 훌륭하시고, 또 섬기고 나누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셨답니다. 자연히 그 분의 목회도 그런 모양이 되었구요. 그런 목사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성도들이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그 목사님께서는 그것으로 공부하기 힘든 학생들, 또 여러 사정으로 취업하기 힘든 상황에 있는 대학생들을 도우셨답니다.  졸업을 시키고, 또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다른 공부를 시키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전부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또 갈 곳 없는 전과자들도 교회에 들어오게 해서 똑같이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되고, 거저 얻었으니 거저 내놓는다는 식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 교회의 성도들과 교회의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었답니다. 결국 그 교회는 그야 말로 네 것 내 것이 없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고, 시간이 흘러 그 교회 구성원들이 여기 저기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들이 가는 곳마다 또 그런 공동체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권사님은 동생이 가정보다도 너무 그 교회를 섬기는 일에만 열심이어서 조금은 걱정이라고 하시면서 그렇지만 들어보니 그 교회는 완전히 초대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현세의 100배의 복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부어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백 배의 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시는 복, 그래서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과 복음이 너무 좋고 귀해서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된 사람들, 원래는 낙타였지만 바늘로 변화되어져 가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복은 분명히 부어졌습니다. 초대교회에 부어졌습니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가족을 백 배나 받았고, 집을 백 배나 받았으며, 전답을 백 배나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딱 예수님 약속 그대로였습니다. 초대교회니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일은 언제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이 너무 좋아서 나의 것을 나의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그런 풍성한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어떤 교회의 이야기는 그것이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말씀드린 예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100배의 복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부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적으로 보면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로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하다, 가난하다 해도 먹고 사는 걱정을 해야할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은 삶의 질을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양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조차도 그 안에서 진짜 풍성함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들까지 그럴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시는 복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주님은 백 배의 현실적인 복을 교회에 담아놓으셨습니다. 주님의 자녀들, 하늘의 가족들이 그 복을 함께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이 복을 오로지 교회에만 넣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 개의 주머니 중에서 딱 하나에만 보물을 담아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복은 교회가 아니고서는 맛 볼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애석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지금 그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바로 이것 때문에 성도들 조차도 풍성함을 모르고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어떤 방식으로 풍성해지는 곳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얻으려고 해서 얻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줌으로써 얻는 곳입니다. 가지려고 해서 풍성해 지는 곳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풍성해 지는 곳입니다. 먼저 하나를 줄 때, 백 개가 돌아오는 곳. 이런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풍성함의 원리입니다. 


때로 교회 안에서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나 혹은 반복되는 좋지 못한 경험이 섬기고 나누려는 우리의 마음을 좌절시키고 그래서 우리로 부터 그 복된 마음을 빼앗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시험에 빠지게 될 때, 항상 우리를 찾아오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뭐 나만 이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으면, 우리는 그 때부터 섬기고 나누는 일을 조금씩 줄여가게 되고, 나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나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나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100배의 풍성함을 생각한다면, 답은 전혀 달라집니다. 나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니다. 적어도 그것이 그러한 우리 모두가 누릴 100배의 풍성함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섬김을 받을 때, 교회 안에서 꼭 필요한 도움을 얻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십니까? 그럴 때 혹시 막 화가 나고 기분이 확 나빠지는 그런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죠. 행복해 집니다. 넉넉하고 풍성해 집니다. 기뻐지고 든든해 집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그런 선한 일의 출발점이 되면 안되겠습니까? 조금 손해보고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그런 행복과 풍성함의 출발점이 되면 안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도 우리를 위해서 낭비하셨는데, 그 필요없는 선택 덕분에 우리가 구원얻고 이렇게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허락된 그 풍성한 복을 누리려면 우리가 반드시 처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색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이건 교회 안에서는 ‘인색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하고, 또 필요한 만큼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대상이 시간이 되었든, 물질이 되었든, 몸을 움직여 해야하는 귀챦게 여겨지는 자질구레한 일이 되었든, 그도 아니면 나의 마음이 되었든 교회 안에서 넉넉한 풍성함을 누리려면 그런 ‘인색한 마음’을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저는 신앙을 생각할 때마다 이 ‘손’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각자 여러분의 손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드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꼭 닫혀진 물병에 물이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마찬가지입니다. 내 것을 고집하느라고 꼭 쥐고 내밀지 않는 손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또 내 것 하나를 고집하느라고 다른 이들에게 펴서 내밀지 못하는 손에는 다른 사람들이 주는 풍성한 것들도 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것을 고집할 때, 나 스스로도 풍성해 질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의 여러분의 손은 어떤 모양인지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교회 안에서의 나의 손이 꼭 쥐고 내밀지 않는 인색한 손은 아닌지, 그리고 과연 나의 이 손 안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것이 담길 수 있을까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오늘 주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영생을 보장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그는 내세에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현세에 교회를 통해 집과 형제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이 땅 위에서 하늘의 풍성함을 이미 맛보고 누린 사람입니다. 이미 이 땅 위에서 하늘의 풍성함을 맛보고 누렸으니 그 사람이 내세에 영생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세에 누릴 영생의 영광과 풍성함을 이미 교회 안에 맛보기로 넣어두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넉넉하게 헌신함으로써 하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의 말씀처럼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함께 있어서 정말로 풍성한 100배의 은혜와 복이 있는 그런 곳이 되기를 진실로 소원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를 내놓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백이 되게 해 주신다는 믿음, 그러면 내세에는 영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인색함’과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움켜쥔 우리의 손을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펴야 합니다. 그렇게 부어주실 풍성함을 담기 위해 우리의 넉넉한 손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크게 넓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서로에게 인색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낭비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서로를 향해 넓혀지고 또 열려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우리 교회를,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풍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서로를 향해 거룩한 낭비의 삶을 살아서 현세의 풍성함과 내세의 영생을 받아 누리는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