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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1.03. 주일오전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마가복음 50)



막1032to45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마가50).pdf


20131103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32-45절


먼저 오늘 말씀을 살피기 전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제대로 알고 또 확신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되고 괜한 오해를 하게 되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또 잊지 않으면 신앙을 풍성하고 능력있게 만들어 주는 원리 하나를 다시 한 번 복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해도 유익하니까요. 


어린아이의 손에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려있습니다.  그 앞에서 그 아이의 삼촌이 1000원짜리 한 장을 들고서 “너 그거 삼촌주면 삼촌이 이거 줄께. 나하고 바꾸자.”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야기 해도 아이는 백 원짜리를 쥔 그 손을 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삼촌은 그런 조카가 귀엽기도 하지만 참 답답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아이는 왜 이런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 아이에게는 100원짜리 동전이 제일 값진 것이고, 천원짜리 지폐는 그저 종이 한 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100원보다는 1000원이 훨씬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는 절대로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성경에서 ‘이것은 해라, 또 저것은 하지 말아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요구들은 그것 자체로도 힘든 것이지만 실제로 이 요구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고, 또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런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 더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 요구들에 대해서 은근히 거부감이나 억하심정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또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부작용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실까요? 왜 우리가 그냥 대충 편하게 예수 믿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편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편한 것, 익숙한 것, 우리의 욕심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손에 쥐고서는 진짜로 좋은 것을 얻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100원짜리 동전을 쥔 손을 펴지 않는 한, 그 손에 1000원짜리 지폐를 쥐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이는 삼촌이 자기 손에 있는 100원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삼촌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강해질수록 그 손에 더 힘을 주게 되고, 계속 이야기하면 울음을 터뜨려 버리겠지요. 그러나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삼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는 삼촌의 생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우리를 정말로 유익하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린아이처럼 우리 것을 쥔 손을 꼭 움켜쥐고 펴지 않으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더 좋은 것도 얻지 못하고 더 유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에는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그러시는 것이다.”  조금 더 와 닿게 표현해 볼까요? 한 번 더 따라하겠습니다. “우리 손에는 언제나 100원짜리가 있고, 하나님의 손에는 언제나 1000원짜리가 있다.” 이것을 알고 또 받아들이는 것이 복되고 능력있는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이 원리를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순종이 우리를 참으로 복된 삶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인도하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흔히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영광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부활하시기는 하겠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잡혀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걸으면서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이야기를 기록한 후에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예수님께 와서 슬쩍 청탁을 넣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청탁인즉 ‘주의 영광 중에’ 둘 중 하나는 오른 쪽에, 나머지 하나는 왼 쪽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시면 분명히 유대 땅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되면 높은 자리 한 자리 차지하려는 심산이었고, 그래서 다른 제자들보다 선수를 친 것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 청탁을 하면서 ‘주의 영광 중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다윗과 같이 능력있게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왕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 있어서 ‘주의 영광 중에’라는 말은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사람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잔’과 ‘세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실 영광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이후에 얻는 영광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으려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사람에게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또 오해합니다. 아마도 그 잔을 승리의 잔으로 오해한 듯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대답부터 하고 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싶은 ‘그 높은 자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대답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두 사람도 나중에는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고 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그 자리를 얻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지막에 예수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원칙은 분명합니다. 누구의 삶과 죽음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닮아 있는 사람이 주의 영광 중에 주님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누가 될 지를 결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 앉게 될 사람들 자신입니다. 기준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거기 앉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가지는 첫번째 눈에 보이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 후에 일어나게 될 사건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내 좌우편’, ‘예수님의 좌우편’이라는 말을 들으시니 혹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없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골고다 언덕의 광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에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오늘 본문과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는 마가복음 15장 두 군데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이 그 말씀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골고다 언덕 위 예수님의 왼 쪽과 오른 쪽에는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 두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했던 예수님의 옆자리에 않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상징하고 있는 바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를 요구하면서 번쩍 번쩍 빛나는 이 세상의 권좌 옆 자리를 생각했습니다. 그 권좌가 예수님이 왕이 되어 앉으시는 자리이며 또 다스리실 자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자신의 왕좌로 취하실 것이며, 또 거기 앉아서 온 우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좌우의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려면 다른 곳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좌우편의 강도들처럼 예수님 옆 자리를 지키며 그 자리를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로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좌우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진짜로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저희 학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학교와 학과가 다 그렇게 했겠지만, 어느 날 저희는 학과에 들어온 구인 의뢰서를 기준으로 누가 어떤 회사에 입사지원을 할 것인지를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은 회사를 좋은 회사 순서대로 주욱 늘어놓은 다음, 그 의뢰서의 갯수만큼의 숫자가 적힌 제비를 준비한 후에, 한 사람씩 제비를 뽑아서 차례대로 회사를 배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5번 제비를 뽑았다면, 다섯 번째로 좋은 회사로 면접을 보려 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작업을 하는 당일날 한 차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졸업생들이 모두들 제비를 뽑아서 저마다의 순번이 정해지고 그렇게 줄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비를 뽑았던 동기 중의 한 명이 자신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면서 그 제비를 맨 뒤쯤에 서 있던 다른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번호는 변동되지 않은 채로 그 제비를 받은 한 사람만 앞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피해가 없습니다. 그 친구보다 앞에 있었던 사람들은 제 자리이고 뒤에 있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한 번호씩 앞으로 당겨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제비를 받은 동기가 들어가야 할 자리 바로 뒤에 있는 한 친구가 그것을 문제 삼아서 그럴 수는 없다고, 자기가 그 앞으로 가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란을 피운 친구는 다름 아니라 그 이전에는 바로 제비를 받은 그 친구와 굉장히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습니다. 저는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게 함께 놀고 즐기는 친구들의 한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두 사람은 함께 놀러 다니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을 만큼은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고 되어 있는데, 이런 제자들의 ㅁ습은  그 날의 제 대학동기들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3년이라는 세월을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함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수많은 일들도 함께 경험하며 동고동락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서로 얼마나 친밀해져 있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내 것 네 것이 없는 사이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런 사이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에게 얻으려고 기대하는 것이 똑같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꼭 이겨야 할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치자 그게 그렇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한 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경쟁심을 꼭 필요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사실 경쟁심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 내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경쟁자로 보고 경쟁심으로 대하는 한, 사람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절대로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사회는, 그 곳이 교회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모두와 경쟁하는 폭력 없는 싸움터가 되고 맙니다. 결국 교만과 지배욕이 다스리는 상처와 분노, 그리고 열등감이 가득한 곳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전체를 경쟁심이 없는 없는 곳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그런 자기 중심적인 경쟁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적어도 우리가 속한 교회만큼은 그렇지 않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명에 집중하여 살면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고 서로를 경쟁심으로 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만 독특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시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게 하셨는지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소명이 바로 경쟁심을 치유하는 거의 유일한 치료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속에 이 경쟁심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서로 화내며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교실에서 서로 다투다가 선생님께 호출받은 아이들처럼 예수님 앞으로 쭈뼛대며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운을 떼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방인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오르면 그들은 자신이 원래 하고 싶어하던 것을 합니다. 남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또 힘을 사용해서 그들을 힘없는 사람들을 자기 아래에 둡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라고는 자기자신 밖에 없을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여기 나오는 ‘이방인’이라는 말은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같은 동기를 가지고, 이방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서로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세상이 다 그래도 너희들 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나를 믿고 따르는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으로는 큰 사람이 되려면 남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면 남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에게 섬김을 받는 자리로 가려고 하고, 첫째가 되기 위해서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첫째가 되려면 종의 자리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식을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사실 상식조차 지켜지지 않아서 혼란과 무질서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상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능이 아닙니다. 상식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식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 정도면 괜챦다고 인정한 방법, 그 정도면 지혜롭다고 인정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상식은 올바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상식을 결정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니까요. 상식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상식이 가지는 첫번째 한계입니다. 그리고 상식은 땅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땅에서 심고 땅에서 다 거두려고 할 때만 통하는 방식입니다. 하늘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다는 것. 이것이 상식이 가지는 두번째 한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식이 하나님의 원리와 부딛힐 때, 상식은 항상 하나님의 원리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상식이 가지는 세번째 한계입니다. 상식이 이런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식은 그것이 뒤집혀야만 할 때는 꼭 뒤집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제자들에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높아지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절대로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무조건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향해서 “절대로 첫째가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꼴찌가 되려고 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높아지려고 하고 첫째가 되려고 하되 먼저 어디서 높아지고, 어디서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지 그것부터 확실히 정해야 한다. 그것에 따라서 높아지는 방법, 첫째가 되는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짜로 높아져야 할 곳에서 높아지고, 꼭 첫째가 되어야 할 곳에서 첫째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시고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 자녀들이 노는데 일등이 되고, 말썽부리는데 최고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겠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진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꼭 일등이 되어야 할 곳에서 일등이 되기를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일등이 될 필요와 가치가 없는 곳에서 일등이 되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말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또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분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높아져야 할 곳에서 높아지고 일등이 되어야 할 곳에서 일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생각에 우리는 땅에서 높아지고, 땅에서 일등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하늘에서 높아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잠깐 동안 높여진 후에 영원히 낮아져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한 번 높여진 후에는 영원히 그 높음을 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방법이 사람들의 상식과 반대가 되는 것은 그 방법이 상식이 다스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하늘에서 높아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늘나라는 낮아져서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그런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하늘나라가 그 방법으로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진짜로 이 말씀대로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실 때,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셨으며 돌아가실 때도 그 귀한 목숨을 죄인들을 위해서 대속물로 내어 주시며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십자가이고요.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에서 예수님의 다스리심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겸손과 섬김의 상징인 십자가가 예수님의 보좌가 아니라면 하늘나라는 결코 하늘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나라는 여전히 경쟁과 힘이 다스리는 지금 이 세상을 닮은 그런 곳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서 높아지려면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려면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우리가 앉게 될 자리는 이 땅의 삶에 대한 상급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자신을 더 많이 낮추고 더 많이 섬긴 사람일수록 그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런 설명을 들려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시고 또 섬기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은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로 중요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것, 최고로 좋은 것을 위해서 덜 좋은 것을 기꺼이 내려놓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땅에서 높아져야 합니까? 하늘에서 높아져야 합니까? 여기서 잠시 높아져야 합니까?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기서 낮아져서 섬기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더 크게 높여주시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1000원을 얻으려면 내려놓아야 할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100원짜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000원짜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서 100원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높아지는 것의 참된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낮아져서 섬기는 일을 훨씬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충 잘되기 보다는 제대로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낮아지는 것이 힘들고 수고하여 섬기는 것이 불편해 지며 또 귀찮아 지시거든, 애써 섬김의 자리를 외면하고 싶어지시거든 그것 때문에 하늘에서 누리게 될 그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광이 내 안에서 찬란하게 빛날 때까지, 그 소망이 우리를 웃게 만들 때까지 그 영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땅에서 낮아진 만큼 하늘에서는 높아질 것입니다. 여기서 섬긴 만큼 하늘에서는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꼭 가장 좋은 것을 위해서 덜 좋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예수님처럼 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처럼 낮아지고 주님처럼 섬겨서 하늘에서 우리 주님께서 누리고 계시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복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내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하소서. 나에게 땅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이 보여지게 하소서. 

그것을 위해서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힘들더라도 섬김을 위한 낮은 삶을 살게 하소서.  섬김의 수고를 감당하게 하소서. 주변의 궂은 일을 살피고 그 일을 기뻐 행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