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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07. 새벽예배 - 나는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세기 78)


창2301to09 - 나는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7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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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3장 01-09절

아브라함의 인생도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인생도 파란만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믿음의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지 않았고 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법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90세에 이삭을 낳았고, 물론 사라는 모르고 있었던 것같지만 아들을 잃을 뻔하기도 하고, 결혼한 여인이 두 번씩이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라에 대해서 긍적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여인으로 인정해 주었고, 베드로전서에서는 남편에 대한 사라의 순종을 본받아야 할 여인의 모범으로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결국 사라도 때가 되니 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앞에서 굉장히 슬퍼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함께 살아온 험한 세월이 있었고, 또 사라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아브라함의 머리 속에는 자신에게 믿음이 부족할 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사라에게 몹쓸 짓을 시켰던 기억이 나서 더욱 더 그랬을 것입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그 사람을 보내기 아쉬워서 슬퍼하기도 하지만 미안해서 더 슬퍼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함께 있을 때 서로 서로에게 많이 미안해 할 일은 하지 않고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겠지요. 


슬퍼하던 아브라함은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머물던 땅 의 주민들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제공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때까지 꽤 오랫동안 그 지역에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참 놀랍고 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을 만큼 강성해 진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살았다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 쪽에서의 순종 때문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곳이 약속이 땅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땅은 자신이 아니라 먼 훗날 자기 후손들의 소유가 될 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래서 그는 충분히 재력이나 영향력 면에서 그 곳 땅을 사서 자기 땅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순종은 그가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는 말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아브라함은 적어도 자신은 그 땅을 영원히 차지하고 살아갈 그 땅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스스로 그 땅의 나그네로 자리매김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사라를 장례지내기 위한 묘지를 제공해 달라는 아브라함에게 헷 족속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을 그 땅의 영구 거주자가 아닌 임시 체류자로 여겼지만, 오히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신들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역설적이죠. 아브라함은 그 땅의 주인이 될 생각이 없었고 지도자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그 지역 사람들 스스로 아브라함을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며 살아갈 때, 그래서 이 땅을 소유하려고 들 때는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성도답게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며 또 이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의미있는 사람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로 오히려 가치있는 자리매김을 하고 살아가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가 이 땅의 나그네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잠시 머물다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될 사람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땅에 묶이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나라 국회에 그렇게 많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나라는커녕 정당 하나도 그리고 국회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그저 그들 속에 섞여서 똑같은 모양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려고 하지 않고 땅의 주인으로, 마치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국민의 사분의 일이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도 이 나라를 정직하고 바르게 세워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땅의 주인으로만 살아가려고 하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나그네로 살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다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을 받게 되고, 또 이 세상을 위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면서 그 영광스러운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지만 나그네로 사는 것이 우리가 귀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존중 받으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헷 족속의 제안을 받고서 그들 앞에서 보인 아브라함의 태도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아가는 일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헷 족속이 자신을 높여주는 말을 듣고 아마 아브라함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그 곳에서의 위치가 그 정도까지인 줄 구체적으로 확인했던 것은 처음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쭐해 질 것입니다. 교만해지고 그 위치를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인정을 받고나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헷 족속을 향하여 겸손하게 몸을 굽혀 오히려 그들을 향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아마도 겸손일 것입니다. 성도들도 교만과 싸우는 일을 가장 힘겨워 하구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이 오래된 숙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그렇게 인정해 주고 높여주는 헷 족속 앞에서 여전히 겸손함을 잃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 순간에도 자신은 그 땅의 임시거주자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고 또 누리고 있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당연한 것이 됩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고, 그래서 그런 것을 누릴 자격이 나에게 있는 것이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겸손할래야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나그네로 자리매김하고 살아가면 어떨까요? 그 사람에게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얻은 것, 자신이 누리는 것은 모두가 다 은혜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자신은 나그네이니까요. 이 세상에서 잠시 자리를 얻어 머무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나그네 의식만큼 소중한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기며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 스스로를 지켜내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는 방법이며, 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의 주인이 아닌 나그네로 부르셨습니다. 원래 모든 인간이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지만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영광스럽고 귀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제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를 보여주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나그네의 자리,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자리로 다시 불러내셨습니다. 항상 이것이 우리를 향한 부르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이 땅의 주인이 아닌 나그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향기롭고 자유롭게 해 주실 것이며, 겸손하고도 빛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복을 놓치지 않는 성도들로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