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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08. 새벽예배 -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창세기 79)



창2310to20 -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창7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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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3장 10-20절


창세기 23장 전체는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이 사라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 중에서 창세기에서 이만큼 자세하게 기록한 사건이 없을 정도로 창세기는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렇다면 사라의 장례를 치르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첫번째로는 이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변화된 아브라함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변화된 모습은 어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나그네’라는 말 한 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전에 믿음이 부족할 때는 나그네로 부름 받았으면서도 나그네로 살기 싫어서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번씩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그렇게 아내를 팔아넘기면서 비굴하고 위선에 가득 찬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나그네로 자리매김 했을 때,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영원한 거처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겸손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높아지면 교만해 지게 마련인데, 아브라함은 높아졌으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다 자신을 이 땅의 영구 거주자가 아니라 나그네로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분문에도 변화된 아브라함의 모습이 또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서 사라를 매장할 굴을 사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머리에 있는 굴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래서 헷 족속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에브론은 헷 족속 중에서는 유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요청을 듣고 모두가 듣는 공개석상에서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굴 뿐만이 아니라 밭도 함께 줄테니 거기다 사라를 장사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호의에는 전심을 다해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도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브론이 계속해서 설득해도 굳이 거절을 하면서 결국 그 밭을 제 값을 주고 사들여서 거기에 사라를 장사지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아브라함은 이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소돔성을 전쟁에서 구해주고 커다란 선물을 제공받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 덕분에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다고 하면서 그 선물을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그 지역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소명에 충실한 모습이 그 때는 그렇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며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아는 사람은 항상 남에게 주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받기만 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줄 수 있는데도 받기만 하고 움켜쥐려고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그 땅의 나그네라고 여겼기 때문에 헷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받는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그것을 매우 고맙고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위치가 주는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원하는 땅을 마음대로 요구하고 또 제공받고서도 당연한 듯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누리는 것을 전부 특별한 은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고, 또 자기가 원하는 땅을 얻게 되었을 때, 끝까지 그 댓가를 치르고 그 땅을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나그네로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값을 치르지 않고 귀한 남의 땅을 덥썩 차지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복을 흘려보내도록 그 자리로 보냄받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서 우리 자신의 성도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임시거주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위한 복의 통로로, 복을 나눠주고, 어떻게 하든 이 세상을 더 복되게 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삶은 아주 특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나그네는 남들이 주는 것을 제공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나그네로 살면서도 거꾸로 세상을 복되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그네로 살지 않으면, 영구 거주자로 살아가려고 하면 복의 통로 역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 세상에 영원히 자리 잡고 살아갈 사람으로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나눠주기 보다는 쌓아 놓는 방향으로 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댓가를 치르지 않고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는 그런 모습이 고개를 들게 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그네이며 동시에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당하게 댓가를 지불하고서 사라를 장사 지낼 굴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후일에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 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는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요셉은 이집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동족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곳에 자신을 장례 지내 줄 것을 맹세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무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땅이 그렇게 제 값을 치르고 산 곳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귀환하였을 때, 그 땅만큼은 자신들의 땅이라고 정당하고 편안하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중에 자신의 그런 행동이 그런 열매로 후손들에게 주어지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아브라함의 이런 삶의 모습은 사실 두고 두고 그의 후손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유익하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그 땅을 구입한 덕에 그 땅은 그렇게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에게 속한 땅이 되고, 또 약속의 땅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최선을 다해서 댓가를 치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그네와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삶에 어울리는 삶의 모습이며, 또 하나님의 성품에도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댓가를 지불하고서 얻은 것들은 우리 삶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고, 또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평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가 성도이면서도 쉽게, 그리고 제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것들일 때가 많습니다. 


항상 내가 이 세상의 나그네요 또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얻기 보다는 나눠주는 삶을 사시고, 최선을 다해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또 우리 삶을 하나님의 손에서 평안하고 복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정정당당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열매들이 많은 그런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