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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1.24. 주일오전 - 보기를 원하나이다(마가복음 52)


막1046to52 -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마가52).pdf


20131124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46-52절




요즘 영화들 중에는 시리즈 물로 만들어 지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1편, 2편, 3편… 그리고 그 영화의 스토리가 시작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리퀼이라는 전편까지 주욱 영화로 만들어져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 한 편 한편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이 나지만, 동시에 그 한 편 한 편은 전체 스토리에서 독특하게 차지하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 씩 따로 볼 때도 재미가 있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전체 이야기와의 관계 안에서 보면 훨씬 더 재미가 있습니다. 한 편씩 볼 때는 이유와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장면들과 작은 사건들도 전체 스토리 속에서 그 의미가 되살아나서 전체가 하나로 확 연결될 때는 영화보는 재미가 훨씬 더 커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 하나의 사건들이나 말씀들을 하나 하나 읽고 묵상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마치 성경이 서로 상관이 없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묵상하게 되죠. 물론 하나 하나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읽고 묵상해도 충분히 의미와 은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그렇게 단편적으로 읽고 이해하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 본문을 통해서 정말로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이야기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교훈과 풍성한 은혜를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이죠. 성경은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책입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 전체도 그렇지만, 성경의 각 권은 그 한 권 한 권이 너무나 훌륭한 문학작품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을 닮아있으니 인간이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면 하나님은 완벽한 이야기꾼이실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이라면 원래는 한 권 한 권으로 쓰여졌던 이 성경책의 각 권은 그 하나 하나가 가장 잘 쓰여진 책들일 수 밖에 없고, 바로 그 책들의 짜임새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더 짧고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속도도 굉장히 빠르죠. 그래서 특히 성격 급하신 분들이 더 좋아하는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빠른 진행 속에서도 각각의 이야기는 전체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구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지난 주일에도 함께 살펴보고 묵상했던 본문입니다. 그 때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한 사람을 구원하고 또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가져다 주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만 떼어놓고 보아도 정말 은혜롭고 너무 귀중한 말씀이죠. 그런데, 이 바디매오 이야기는 마가복음을 하나의 연극에 비유한다면, 3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의 제 2막 마지막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막은 1장부터 7장까지로 갈릴리와 그 주변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고, 2막은 거기서 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리고 마지막 3장은 다음 주일 본문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2막은 아주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 이야기와 끝 이야기가 똑같은 종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8장에 나오는 벳세다 맹인의 치유 이야기는 그 맹인이 두 단계에 걸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확실하게 보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0장에 나오는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 속에는 바디매오가 그의 믿음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두 개의 비슷한 이 두 이야기들이 8장부터 10까지의 모든 내용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뻔한 질문을 몇 개 하겠습니다. 물그릇에는 무엇이 담겨져야 가장 잘 어울리죠? 물입니다. 그러면 기름병에는요? 기름입니다. 사탕 그릇에는요? 사탕이 담겨야 제일 어울립니다. 물론 어떤 외국인은 예쁘게 생긴 그릇이 있어서 그것을 사다가 집에서 사탕을 담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요강이었다고 하지만, 각각의 그릇에는 그 그릇에 어울리는 내용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맹인의 치유 이야기로 만들어진 마가복음 8장과 10장이라는 그릇에는 무슨 내용물이 담겨야 어울릴까요? 아주 정확하게는 몰라도 분명히 눈과 관계된 이야기, 눈을 뜨는 이야기들이 담겨기는 것이 제격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부터 10장까지는 맨 앞과 맨 뒤를 빼면 눈을 뜨는 이야기들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그 중간에는 여러 사람들의 아주 안타깝고 답답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말리고 비난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그런 직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서로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않겠다고 다투었습니다. 또 특권의식에 빠져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도 막아 섰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예루살렘 입구에서 예수님 덕에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자기들끼리 서로 티격태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내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만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크게 성공했고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던 부자 또한 많은 재물 때문에 영생의 길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들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ㅁ 이 모든 이야기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보지 않아도 될 것들만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영적인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정작 뜨고 있어야 할 영혼의 눈은 캄캄하게 닫혀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앞뒤에서 감싸고 있는 두 명의 맹인치유에 대한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해서 두 개의 아주 중요한 메세지를 들려줍니다. 첫째는 우리의 영적인 눈은 계속해서 더 밝아져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그렇게 완전히 밝아져서 반드시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참 신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벳새다의 맹인은 예수님의 첫번 치유로 모든 것들을 뚜렷하게 보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 같은 것이 흐릿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만을 보았고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안수하셨을 때, 비로소 모든 것들을 또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과정도 이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한 번에 완전하게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어서 신앙 안에 들어있는 모든 진리와 은혜들을 한꺼번에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만해도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저는 목사가 되어서도 한참 동안은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또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또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뿌옇게만 보고 있었던 ㄷ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그게 전부인 줄 알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벳새다의 맹인의 눈에 안수를 해 주셨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제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흐릿하게만 보던 것들을 점점 뚜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들을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보는 과정, 그러니까 시력이 회복되어져 가는 과정 속에 있고 아마도 평생을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이 과정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얼마나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만 계속해도 평생 신앙생활이 지루해질 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경험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다 똑같이 믿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더욱 더 무궁무진한 은혜와 진리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영적인 기쁨과 만족도 그것과 비례해서 커진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신앙 안에서 무엇을 보고 있든지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저 그것만 보이니 지금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될 뿐입니다. 계속해서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더 밝게 떠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를 구하시고, 그것을 목표삼아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점점 더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누릴 수 있게 되는 풍성한 은혜와 진리들이 많아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눈을 떠서 정말 제대로 보아야 할 것, 그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알고 또 다 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적어도 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풍성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것들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도 또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니 누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사람들은 왜 모두가 다 영적으로 실패했습니까? 이유는 그리 거창한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는 보았어도 믿음으로 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디매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평생 그 어떤 것도 자기 눈으로 본 적이 없었죠. 그가 사는 동안 그가 사는 세계는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그리고 명확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디매오 하면 그가 경험했던 눈을 뜬 기적을 제일 먼저 떠올립니다. 그게 그가 얻은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렇지만 사실 그가 눈을 뜬 것은 그저 그가 하나의 눈을 떴더니  따라온 부록과 같은 은혜에 불과합니다. 바디매오가 경험했던 진짜 은혜는 비록 앞을 보지 못했어도 예수님 만큼은 제대로 보고 있었던 바로 은혜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밝은 빛을 보게 되니 나머지 빛들 또한 그의 눈에 들어와 그가 사는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정말 얼마나 공평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능력과 조건에 따라 결정되지만 믿음만큼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소외된 곳에 있는 가장 소외된 사람도 그 마음만 예수님께 제대로 열려 있다면 가장 풍성하고 확실한 믿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걸인도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분명하게 예수님을 알아보는 가장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열린 마음과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그 마음만 충분하면 믿음에 있어서는 가장 부유한 자가 될 수 있고, 바로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은혜들이 모두가 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와 거하시니까요.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는 목회자로서 우리 교회와 여러분을 향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간절한 소원 한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더 큰 교회가 되거나, 더 부자 교회가 되거나 심지어는 그럴 듯한 이름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가장 크고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이 그 무엇보다도 믿음에 있어서 부유한 사람들이 되고, 또 그런 넉넉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로 더 이상의 성공은 없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 이 세상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서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만족스럽고 기쁘고 평안하며 또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지금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마음을 다해서 권면합니다. 절대로 믿음에 있어서는 손해보고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러분의 믿음에 손해가 될 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속에서도 믿음에서만큼은 부유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부유해야 정말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영혼이 느끼는 것이니까요. 평생 거지요 맹인으로 살았던 바디매오가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날마다 더 부요해져 가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고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 복은 절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몸은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이 마가복음 8장부터 10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내 주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몸만 함께 하고 있을 뿐 마음으로는 항상 예수님과 어긋나가고 있었습니다. 항상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항상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우리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항상 주님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존재와 삶은 주님과 항상 거리가 있습니다. 도무지 내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질 않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모르는데 문득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영혼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죄책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한 번 제대로 능력있고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해 보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 오래 묵은 숙제같은 문제를 꼭 한 번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고, 그래야 풍성하고 기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결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또 제대로 믿는 일입니다. 그 분을 제대로 만나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몸으로는 삼 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어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진짜 제자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예수님을 만났던 바디매오는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고쳐 주신 후에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 대신에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그가 있었던 원래의 삶의 자리, 그가 있어야 했고 또 누려야 했던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 이제는 정말 사는 것처럼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쳐진 사실을 알리고 이제는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도 아니고 그래서 꼭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는 눈을 뜨자 마자 그 눈으로 보게 된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습니다’. 길과 따른다는 말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나타내기 위한 말들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바디매오를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바디매오는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이런 저런 간절한 욕구들을 뒤로 한 채로 자청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항상 비교를 한 후에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위해서 댓가를 지불할 때는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치르는 댓가보다 큰 만족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곧 보게 되어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죠. 바디매오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게 되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 심지어는 자기 인생 전체보다도 더 값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모르니 그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서 따르는 일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 부담스러워 지게 되는 것이죠. 사실 성경을 보면 바디매오 이야기와 똑같은 메세지를 들려주는 말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밭에서 우연히 감춰졌던 보물을 발견했던 농부의 비유, 삭게오 이야기,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여인의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들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하늘나라와 예수님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와 예수님이 가장 값진 분이셨던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보다가 요즘 인기가 한창인 걸그룹과 그 걸그룹을 좋아하는 삼촌팬들이 함께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삼촌팬이라는 말은 잘 아시죠? 늙수그레한 사람이 자기 조카같은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하게 붙여진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제가 보니 그 삼촌팬들은 죄송합니다만 정말 미친 것 같았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은 자기 애인의 생일과 걸그룹 의 한 멤버의 생일이 겹쳤는데 애인의 생일을 챙겨주지 않고 그 멤버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애인과 헤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 생일파티에 너무 너무 가고 싶어서 거기 갔습니다. 애인 생일이야 다음 날 챙겨줘도 되니까요.” 당사자인 걸그룹의 멤버도 약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우리로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 이것은 사람들의 가치체계 속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단 어떤 것이 진짜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게 되면 무엇이든 그것을 위해서는 아까워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있고서야 세상도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을 위해서 우리 인생 전체, 존재 전체를 투자하는 것은 마치 걸그룹 삼촌팬이 멤버 생일파티에 가겠다고 애인을 나몰라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선택이 됩니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을 위해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투자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전체보다도 더 값진 분이십니다. 내 인생 전체를 다 걸고도 남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또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받았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이 바로 그 분 자신이십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의 참된 가치를 알고 그래서 그 분을 얻기 위해서 살아갈 때, 바로 그 안에서만 우리 자신의 진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참된 만족과 허전하지 않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그 분의 가치를 제대로 깨달아야 하며, 그럴 가치는 너무나 충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꼭 빌어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지 않으셔도 가장 우선적으로 달라고 졸라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보다도 우리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기 위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구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신앙 때문에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장 값진 것을 얻기 위해서 기쁘게 달려가는 달음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처럼,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즐겁고 행복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르러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른 것들을 바라보느라고 감겨져 있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혹시 아직도 예수님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진짜 가치가 잘 느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은혜를 꼭 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은혜를 구하기 전에 가장 귀한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장담하건데 우리가 그 은혜를 우리의 은혜로 누리게 되는 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 기쁘고 즐겁게 주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두워진 영안을 날마다 더 밝게 하셔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시고, 흐릿한 것을 분명하게 보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눈으로 이 꽃을 보듯이 온 우주보다 값진 예수님을 확실히 보고 그 분을 따르는 행복한 제자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마다 나의 영적인 눈이 더 밝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보고 알게 하소서. 예수님과 예수믿는 일을 가장 귀한 일로 여길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 주소서. 예수님의 기쁜 제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