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1.29. 금요기도회 -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40)


행0754to60 -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40).pdf


20131129FE (#1).mp3.zip




본문 : 사도행전 7장 54-60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어떤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흥분이 되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고, 또 고인이 너무 너무 부러웠던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종종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목사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도 여러분의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분들에게 슬픔이 아니라 흥분과 부러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때로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혹은 집례하면서 어찌보면 장례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감정들만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제가 고인이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올곧고 당당한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얼마나 자유롭고 평안하셨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면, 저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나는 언제 저 자리에 가나 하는 마음에 질투까지 생깁니다. 저는 고인이 세속적인 기준에서 얼마나 성공을 했고, 또 얼마나 유복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데는 죄송합니다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전혀 부럽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정말 멋진 성도였다면 그렇게 성도로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라면 저는 그 분이 정말 부럽습니다. 나도 고인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간 후에 빨리 누군가가 배웅해 주는 그 자리에 똑같이 있고 싶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꼭 오해하는 분들이 계셔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니 ‘장목사가 빨리 죽고 싶다더라’라는 소문이 퍼져있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죽음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아시다시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일곱 집사 들 중의 한 사람으로 세워진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을 받아 공회에 잡혀갔을 때는 공회원들이 보기에도 얼굴이 천사와 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얼굴이 은혜와 영광으로 빛났던 사람입니다. 정말 최고의 성도요 최고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그가 딱 한 번 공회에서 행한 설교를 마치고는 정식으로 판결도 받기 전에 돌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자고 그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고, 훌륭한 집사로 세우셨으며, 복음 전파자가 되게 하셨을까요? 달랑 설교 한 번 시키시고서 돌에 맞아 죽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그리고 답부터 말씀드린다면 그 대답은 “Yes!”입니다. 


보이는 모습만 보자면,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려고 자신을 심문하는 공회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스데반을 돌에 맞아 죽게 했습니다. 그 훌륭한 인재를 그렇게 죽게 두셨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이렇게 끝날 수도 있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의 인생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죽음,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주 처절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이 스데반의 죽음을 기록하는 분위기는 처절함이나 슬픔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마치자 공회원들은 너무 화가 나서 저절로 이가 갈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성경은 바로 그 순간의 스데반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성도 여러분, 만약 이것을 하나의 싸움으로 비유한다면 이 싸움에서는 누가 이기고 있습니까?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공회원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을지도 모를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평강과 기쁨이 공회원들의 분노와 미움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1승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은 공회원들은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듭니다. 그리고는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스데반이 하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하나님, 억울합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건져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반대로 그는 정말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먼저 죽음을 직감한 스데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난 후 날아오는 돌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 드립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금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데, 그래서 아파 죽겠는데, 그렇게 잘못도 없이 죽어가는데 그 상황에서 마지막 사력을 다해서 드린 기도가 죄 없는 자신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이는 그 사람들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서도 승리자는 누구인가요? 누가 이긴 것인가요? 돌을 던지는 공회원들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여기서 또 다시 1승을 보태서 2승을 거둡니다. 


게다가 성경은 스데반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인간적으로 본다면 억울하기 그지 없는 죽음, 그 처절한 죽음을 그저 “잔다”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죽음을 처절하고 의미없는 죽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일인 잠으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래서요 하나님, 그래서 스데반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묻는다고 가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응.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편하게 잠깐 잠들었다가 하늘나라에서 깼지.”라고 대답하시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게임은 완전히 끝납니다. 스데반은 3전 전승으로 완승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죽음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것이라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만 나오면 너무 심각해지고 너무 민감해 집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육체적인 죽음은 비록 그것이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예수를 믿고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난 후에 맞이하는 죽음은 오히려 복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죽음의 겉모습과 형식이 어떻든지 그 죽음의 내용이 믿음을 지켜내고 나서 맞이한 죽음이라면 그 죽음을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표현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았다면 그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정말 우리 표현대로 짧아도 너무 짧고 굵어도 너무 굵게 살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허무하고 아깝게 생각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그저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바로 그렇게 살아가 그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맡기신 삶과 역할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를 믿되 정말 제대로 멋지게 믿다가 집사로 세움을 받고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설교 한 편 한 후에 그렇게 죽는 것 말입니다. 스데반은 결코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에 그런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스데반이 그렇게 죽는 것을 모르고 계셨던 것도 아닙니다.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자 거기에는 하나님 옆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스데반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비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온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스데반은 주님께서 그렇게 지켜보시는 가운데 살았고 또 그렇게 다스리시는 가운데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약 스데반이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몫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삶을 가장 영광스럽게 살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그는 성경에서 가장 짧고 굵은 삶을 가장 영광스럽게 살다가 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원래 사람의 인생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리기가 힘듭니다. 가난하냐 부자냐, 오래 살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확 드러나는 삶을 살았느냐 숨겨진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 내리는 올바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결코 재산이나 수명 혹은 업적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들조차도 자꾸 이런 것으로 자기 삶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려고 하니까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살아가지 못하며 심지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설수에도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실패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맡겨진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든 간에 자신의 인생을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역할에 충실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지막 까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순종하며 살았다면 최고로 값진 인생을 산 것입니다. 게다가 정말 죽음을 통해서 까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금상첨화입니다. 그것은 100퍼센트, 아니 200퍼센트 성공한 인생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식의 성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래 오래 떵떵거리며 내세울만한 큰 업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그런 종류의 성공을 원하고 또 그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종류의 성공이 주는 유혹은 너무나 강력하고 또 그것이 인간적인 욕망과도 그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것을 떨쳐버리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유혹과 싸워 이겨내고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우리의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가지 않으면 적어도 우리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의 죽음 이야기는 단순히 그의 죽음에 대한 보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가장 화려한 승리에 대한 보고이고, 또 성공에 대한 보고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그 장면 하나 하나를 처절하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은 첫째는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나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도 훌륭했지만 스데반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내놓았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드린 마지막 기도들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서 드린 기도와 완전히 똑같습니다. 스데반도 주님처럼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신뢰의 기도드렸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삶이 성공한 인생입니까? 실패한 인생입니까? 예수님의 삶은 100퍼센트 승리하고 또 200퍼센트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불꽃같이 살았고, 마지막 죽는 모습까지도 예수님을 똑같이 닮아 있었던 스데반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그의 삶도 100퍼센트 성공하고 200퍼센트 승리한 가장 훌륭한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죽음 이야기가 두번째로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스데반이 목숨을 건 설교를 마치자 공회원들은 이를 갑니다. 그 때 여전히 성령충만한 스데반의 눈에는 환상이 보입니다. 그것은 열린 하늘에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스데반을 보고 계셨는데, 성부 하나님의 모습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 옆에 서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자 하나님은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셨을까요? 원래는 앉아 계셔야 하실 분이 그 때는 왜 서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그런 모습을 스데반에게 보여주셨을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우리는 언제 더 이상 앉아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까? 경기가 끝난 경우가 아니라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한참 열이 올라서 응원을 할 때, 그리고 내가 응원하는 편이 득점을 했을 때입니다. 승리의 순간이 다가와서 더 큰 응원이 필요할 때입니다. 저는 그 때 스데반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보좌를 박차고 일어나신 이유도 똑같았다고 믿습니다. 이미 스데반이 한 점을 땄습니다. 너무 기쁘셨죠. 그래서 보좌를 박차고 일어나셨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한 점만 더 따면 승리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일어서신 채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그래, 그래, 그대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예수님은 스데반의 믿음의 경주를 지켜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스데반 또한 예수님과 똑같은 믿음의 경주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완전히 승리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그냥 앉아 계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일어나서 응원하고 힘을 주셔야죠.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일어나셨고 또 그렇게 응원하셨던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상상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 예수님이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울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렇게 흥분해서 보조를 박차고 일어나셔서 우리를 응원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무참하게 빼앗는 폭도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렸을 때, 그렇게 기도드리다가 잠들었을 때, 그 때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부둥켜 안고서 펄쩍 펄쩍 뛰시면서 “이겼다! 이겼어! 스데반이 이겼어! 아버지 스데반이 저처럼 완전히 승리했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르셨을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진다면 스데반 같은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완승을 거두고 천국에 입성할 때는 주님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과연 누가 승리자일까요? 과연 누가 성공자일까요? 이 세상에서 길게 떵떵거리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산 사람일까요? 아니면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자신에게 맡겨신 인생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기 해 드리는 사람들일까요? 믿음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스데반의 죽음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춤을 추시며 기뻐하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이 우리가 승리한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얼굴, 일어 나셔서 춤을 추시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승리한 증거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기준, 이 세상의 기준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보지 마십시오. 그 기준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이미 다 버린 것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앞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시다가 힘드시거든 지금도 하늘 보좌 옆에 서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마지막 승리하는 순간을 흥분과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데반을 충만하게 채우셨던 성령님께서 오늘도 우리들을 가득 채워주시려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항상 눈은 하늘을 향하며 도움의 손을 성령님께 뻗으시기 바랍니다. 그 응원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점수를 올릴 수 있고 또 완전한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눈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우리 인생을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응원하고 힘주시고 또 상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이 세상이 아니니까요. 세상의 평가는 그저 참고사항입니다. 세상에서조차   욕 먹을 정도로 살아서는 절대로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평가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삼위 하나님의 응원과 함께 하심 속에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스데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