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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2.01. 주일오전 -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마가복음 53)



막1101to12 -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마가53).pdf


20131201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1장 1-11절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공교롭게도 절기상으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의 첫번째 주일인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과 함께 시작되는 일임을 생각할 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예수님을 맏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을 모셔들이는 일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큰 은혜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가까와 오자 잠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감람산이라고 불리는 산이었습니다. 거기 멈춰 서신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근처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타고 들어갈 나귀를 구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럴 때보면 제자들도 참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을로 가 보니 진짜로 나귀새끼 한 마리가 어느 집 앞 문간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감하게 그것을  풀었습니다. 제가 ‘용감하게’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이것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낮에 다 드러내 놓고 절도행각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5절을 보면 제자들이 그렇게 할 때, 거기 아무도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귀를 풀려고 하자 몇몇 사람이 제자들을 제지하고 나섰습니다. 엄연히 도둑질이었으니까요. 그들은 말했습니다.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우리 성경에는 굉장히 점잖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따지고 묻는 투로 되어 있습니다. “나귀새끼를 풀다니 도대체 무슨 짓이냐?” 정도의 말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을 막아 섰던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자들을 보내주었고, 그래서 제자들은 그 나귀새끼를 끌고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새끼 위에 자신들의 겉옷을 펼쳐놓고 예수님을 거기 앉으시게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나귀새끼에 타신 채로 감람산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때는 유대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앞두고 있었던 때라 예루살렘 주변에는 순례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키보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 이전의 예수님의 행동과는 완전히 많이 다릅니다. 예수임께서는 이전에는 이런 식으로 움직이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그저 걸어서 여행을 하셨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번에는 유독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번 예루살렘 입성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의 주인이요 백성들의 왕으로서 승리의 행진을 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해 가신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보내셔서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를 구하는 일부터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 나귀를 구하게 하고 그 말도 안되는 요구에 그대로 응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왕이 신하들을 보내서 자신이 탈 짐승을 백성들로부터 마음대로 징발하는 과정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새끼를 구하는 일부터 왕으로서의 권위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가복음을 3막 짜리 연극에 비유한다면 오늘 본문부터는 그 마지막 부분인 3막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제 3막이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 해 들어가시는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만나야 할 예수님은 왕이신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지켜보던 유월절 순례객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렸습니다. 순례객들은 예수님께 환호했습니다. 더러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깔기도 했고, 더러는 급하게 들에 가서 베어온 나뭇가지를 펴놓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특히 겉옷을 벗어서 깔아주는 행동은 당시의 풍습으로는 아무에게나 하도록 허용되어 있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높은 귀족이나 혹은 왕에게만 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렇게 소리 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환호 속에 들어있는 말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며 왕으로 맞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원래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속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으로 맞아 들였습니다. 너무 너무 분위기가 좋아 보입니다. 모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지 않고서 제대로 알아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보이는 모습만 그랬지 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은 모두가 다 스가랴서의 말씀들을 그대로 성취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행진이 감람산에서 부터 시작된 것은 메시야에 대해서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 스가랴 14장 4절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라는 스가랴서 9장 9절과 10절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행진을 시작하시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분명히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이신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나중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이요 또 메시야로 더 쉽게 알아보고 또 더 확실히 믿을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행진해 가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 들였고 또 그에 걸맞는 환호로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침 속에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왕에 대한 생각과는 어울릴 수 없는 생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문제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사람들이 찬양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메시야도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이 이루었던 왕국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위대한 다윗의 나라로 만들어 줄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왕이 되시고, 그런 왕국을 만드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를 쳐부수고 다윗 시대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회복하는 그런 왕이셨다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요? 제가 그림 하나를 보여드릴테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은 ‘정조대왕 능행도’라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정조대왕이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으로 제를 지내러 갈 때의 그림인데요. 특히 이 그림은 그 중에서도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지금의 노량진이라고 하는데요. 그 넓은 강폭을 행차 행렬이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왕의 행차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왕이 납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를 정복하고 다윗 시대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분이셨다면 예수님께서도 이런 모습으로 아니, 이것보다도 더 화려하고 웅대하게 수많은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로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도대체 나귀새끼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서 찾아본 사진입니다. 이게 바로 나귀새끼를 탄 모습입니다. 이것은 아이가 나귀새끼를 탄 사진이니 어른인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셨다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요? 아마 굉장히 우스꽝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것인지 아니면 나귀를 끌고 가시는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히 성경을 보면 나귀는 왕이 타는 동물이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나귀를 타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면, 왜 예수님은 다 자란 어미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왜 굳이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입성하셨을까요? 


이미 읽은 구절이지만 스가랴서 9장 9절로 다시 돌아가 보면 거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구절에는 예수님께서 왜 다 자란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실 수 밖에 없으셨는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은 왕이시지만, 한 나라가 아니라 온 우주를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실 비교할 데 없이 크고 위대한 왕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지극히 겸손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은 겸손한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나귀를 타되 나귀 새끼를 타셨던 것입니다. 최고로 비싼 벤츠를 타고 다니면서 “나는 정말 검소하고 가난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다른 왕들처럼 권력이나 완력, 그리고 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섬김으로 온 우주를 정복하시는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런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맞아들여 예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일부러 나귀새끼를 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려는 것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정말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봅니다. 듣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들으려는 것만 듣습니다. 그저께 라디오에서 나름대로는 잘 알려진 전문가 두 사람이 항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어떤 분의 발언을 놓고 서로 토론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두 사람 사이에는 이야기가 되질 않았습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전혀 의사소통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문제가 된 말을 한 사람은 한 사람이고, 또 그 말도 하나인데 두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저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타고 계신 나귀새끼를 보아야 했으며 그 나귀새끼를 타신 모습을 통해 들려주시려는 예수님의 메세지를 꼭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에는 그 나귀새끼가 크고 화려한 황금 빛 군마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겸손한 왕, 겸손해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께 환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능력으로 자신들 손에 화려한 다윗의 왕국을 쥐어줄 그런 왕에게 환호했던 것입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투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투사는 원래 쏜다, 던진다는 뜻인데요. 자기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나 욕망을 남에게 입혀 놓고서 그 대상을 그 모습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10대들이 아이돌 스타에게 열광하는 것, 자신은 약하지만 강해져서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독제자를 선호하게 되는 것,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자꾸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만 만들어 가려는 것이 바로 이런 ‘투사’라는 심리 때문입니다. 아이돌 스타 속에서, 독제자 속에서, 자녀들 속에서 자기가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죠. 군중들의 눈에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황금빛 군마를 탄 카리스마 넘치는 정복자가 보였던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들 속에 있는 욕심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보았고 바로 그 욕심에 환호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에 대한 정말 수많은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하신 분으로 우리 속에 존재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들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런 생각들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많고 다양한 생각들 중에서 정말로 예수님에 대한 어떤 생각들이 올바른 생각인지 아닌지를 걸려내려고 하지 않고서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와닿는 예수님의 모습, 자기에게 유익한 예수님의 모습만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짧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 정말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문도 그 모든 해답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답 한 가지를 들려 줍니다. 그 해답은 바로 “나귀 새끼를 타신 온 우주의 왕”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입니다. 우리가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겸손과 섬김으로 온 우주의 왕이 되고 또 그 겸손과 섬김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영접하며 또 예수님 답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나귀새끼를 타시고 엉거주춤 행진해 가시는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온 우주의 왕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 답게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 우리가 우리의 욕심이 바라는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께 입혀 놓고서 그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는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삶에 필요한 것이 부족하면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건강하지 않을 때는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필요를 넘어서서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과 통로로 이용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히려 신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풍성하고 참된 복들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어떤 사람이 가장 복되고 풍성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가장 온전히 주님의 다스리심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주님 안에 모든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마가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서 우리의 왕이 되신 그런 왕이시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겸손한 섬김의 다스리심을 더 온전하게 받을수록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 풍성하고 온전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안에 여전히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군마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면,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의 다스리심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온전한 다스리심 가운데 살면서 참으로 풍성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증명된 것도 아닌데 자기를 높이지 않고 또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은, 내가 원하는 만족스런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도들까지도 욕심을 내려놓고 살자는 이야기, 자기를 높이지 말자는 이야기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욕심이 없으면 행복해 질 수 없고, 높아지려고 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습니까?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닙니까? 욕심을 부리니까 만족이 없고, 높아지려고만 하니까 행복이 없는 것 아닐까요?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에게 욕심이 많았을 때는 만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높아지려는 욕망이 강했을 때는 그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인정해 주지 않을 때면 불안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욕심 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리고 높아지려는 것의 덧없음을 알게 되자 그 때부터 진짜 만족이 무엇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만족과 행복은 주님을 통해서 내 소원이 이루어 지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족과 행복은 나귀새끼를 타신 왕이신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 속에서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 분의 다스리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나귀새끼를 탄 겸손한 왕의 그림을 새겨 넣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 그림을 통해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그 그림을 통해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은 언제나 참으로 예수님을 예수님 답게 모시는 신앙이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겸손하고 낮은 마음에만 임하는 예수님의 겸손한 다스리심 속에서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대강절의 첫 주일에 나귀를 타고 찾아오신 겸손한 우리 왕을 마음을 다해 다시 한 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의 겸손한 섬김 속에서 다스림을 받으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