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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2.04. 새벽예배 -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창세기 93)



창2606to11 -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창9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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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6장 06-11절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요. 한 가지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우리의 욕심이나 바램과 반대가 될 때가 많기 때문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그것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이렇지만 않다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순종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뜻이야 말로 우리 본성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고 또 가장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를 지은 후 우리의 욕심과 욕망은 하나님의 뜻과 어그러지기 시작했고, 현실 또한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순종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인간의 욕심을 거스르는 것이 되었고 또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순종은 당장 눈 앞의 것만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손해가 되는 것 같아 보이고 또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짧은 시간을 두고서 생각하면 분명히 손해를 보고 현실적으로는 유리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고 그래서 이 세상은 죄로 오염된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임을 생각한다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더 좋은 열매를 더 많이 맺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선한 것이라고 할 때, 선을 거슬러서 악을 선택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 악한 씨앗의 열매들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이 그랄 지방에 머물면서 생겨났던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가 대물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삭이 저질렀던 죄가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죄를 그렇게 똑같이 닮아있는지, 혹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아내인 사라를 누이동새이라고 속였습니다. 한 번은 본문의 아비멜렉이 아니라 그 선대의 아비멜렉을 그렇게 속였고, 또 한 번은 이집트의 바로를 그렇게 속였습니다. 두 번씩이나 똑같은 레파토리로 왕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의 결과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 왕들이 곤욕을 치루었고, 아브라함은 선물만 잔뜩 챙겼지만 그것이 곧 아브라함이 잘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너무 신앙적으로 어렸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이 그야 말로 봐 주신 것이고, 또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한 사람의 믿음이나 혹은 구원의 역사는 위대한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도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이신지를 배울 수 있었구요. 


그런데 성경이 굳이 아브라함이 저질렀던 죄가 이삭 때에도 반복되었다는 것을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끄집어 냅니다. 결과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것은 이삭의 이야기이도 했지만 앞으로 이어질 야곱이나 신앙의 조상들의 이야기도 똑같이 읽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해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으로부터 본 받을 것도 많고 또 닮지 말아야 할 많은 모습들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런 것들 또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메세지이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잘 하는 것도 있지만 잘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변함없이 인도하시고 움직여 가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일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의 역할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도권과 결정적인 역할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인간의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사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범죄와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각색없이 들려줍니다. 민망할 정도의 이야기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라는 메세지가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라는 메세지를 들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거짓과 불순종 이야기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이삭이 그렇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라는 메세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삭의 이야기 속에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메세지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불순종 혹은 절반의 순종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 또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우리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여행해 가야할 우리들에게는 크게 유익합니다. 


이삭이 그랄 지방에 머물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셔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 해 주셨던 약속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삭이 그냥 그랄 땅에 머물렀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랄은 이집트도 아니고 가나안 지역에 속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이삭이 계속해서 머물렀던 곳은 그저 그랄이 아니라 그랄의 왕인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지역 내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삭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지만 여전히 현실적으로는 아비멜렉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가 그 지역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는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리브가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곳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리브가를 데리고 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말해 주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저질렀던 죄악의 완전한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은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라고 말한 후에 7절은 이삭이 리브가를 자기 아내라고 속이는 내용이 나오고 8절로 넘어가면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라고 말해 줍니다. 그랄은 비록 약속의 땅의 경내에 있는 지역이었지만 그가 계속해서 머물러서는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빨리 떠나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떠나야 할 곳에 오래 머물다가 결국 파렴치한 거짓말로 그 곳 사람들을 속인 일이 들통나게 되었고 자칫하면 큰 낭패를 당할 뻔 했습니다. 만약에 아비멜렉이 그런 정도로 관대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삭은 그 거짓말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 자주 자주 발생하는 위기와 위험인 것 같습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순종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문제가 없지만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문제가 없지 않고, 결국 그런 태도는 신앙도 현실도 다 엉크러지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의 믿는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것은 그것이 예수믿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삭이 그 때는 잘 몰랐겠지만 나중에 신앙의 철이 들고 나서 얼마나 두고 두고 부끄럽고 자신이 싫었겠습니까? 또 이삭을 바라보는 그랄 사람들이 이삭이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그 모든 부작용들은 모두가 다 반쪽 짜리 믿음과 반쪽 짜리 순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성숙할 수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온전한 순종을 선택할 때,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당당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고 우리의 삶을 순적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도 빛을 더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당장 눈 앞만 보고서 불순종이나 반쪽 짜리 순종에 머물지 마시고, 멀리 내다보시면서 온전한 순종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우리들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지혜로운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