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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2.10.새벽예배 -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세기 95)


창2623to33 -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9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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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6장 23-33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것이 이삭에 세 번째 우물을 파고서 한 22절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랄 산지에서 살아갔던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바로 다음 절인 23절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삭이 거기서 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브엘세바가 어디입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 선대의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곳이고 모리아 산 사건 이후에 거하던 곳이었습니다. 이삭이 이리로 옮겨 갔다는 것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이제서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삭은 비로소 다툼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얻은 그 장소를 그렇게 쉽게 떠나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 덕분에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서야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이심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그에게 이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살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장소와 여건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브엘세바로 올라간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이전에 주셨던 약속을 또다시 반복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타나셨고 또다시 같은 약속이지만 약속을 주셨다는 것은 이삭이 그랄을 완전히 떠나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머물렀던 브엘세바로 돌아간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약속은 이전의 약속과 똑같은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전해 듣는 이삭의 귀에도 이 약속이 똑같이 들렸을까요? 똑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도 이상하게도 좋은 책들은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와 닿고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그것은 책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생각도 감정도 바뀌었고, 또 경험도 더 많아지고 풍성해졌기 때문에 같은 책이 전혀 다르게 와 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 또한 그랬을 것입니다. 그 동안 이삭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너무도 확실하고 풍성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같은 약속이 똑같이 들렸을 리가 없습니다. 완전히 다르게 들릴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삭은 그 약속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성소가 이제는 아들 이삭의 성소가 된 것입니다. 이삭은 형식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아브라함의 언약을 물려받았지만 이제서야 온전한 언약의 상속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세월이 흐를 수록 더 견고해지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듣던 말씀이 다시 들려와도 또 다시 새롭고 더 은혜롭고 이제는 정말 믿어지기에 능력이 되어지는 그런 말씀이 되어야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의미도 그래야 합니다. 물론 크고 작은 굴곡은 있을 수 밖에 없겠지만, 일정한 시간 간격을 놓고 보면 나 스스로도 내 신앙이 더 견고해지고 풍성해 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변해가고 또 성숙해 가야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신앙이 멈춰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오히려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견고해 지고 풍성해 지는데 유리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이제 다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해 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5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또 3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랄에 있을 때처럼 브엘세바로 돌아와서도 복을 누리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또 모든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면 하나님도 우리 편에 서십니다. 변함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건 다시 우물을 팔 수 있고 또 어디서건 다시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또 우물을 찾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방해하러 온 것일까요?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이유로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삭이 예전 일을 기억하고는 또 나를 괴롭게 하고 내쫓으려고 찾아왔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전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온 것은 조약을 맺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서로 연약을 맺고 서로를 적대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괴롭히던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비멜렉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상황이 바뀌어도 바뀌어도 어떻게 이렇게 완전히 반대로 바뀔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 뒤에 아비멜렉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은 더 놀랍습니다.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아비멜렉의 말인 즉, 너는 하나님을 상대해야 할 사람이지 사람과 상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과는 레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비멜렉을 위해서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와 조약을 맺고 평화롭게 돌려보내 줍니다. 자신을 그렇게 괴롭혔던 사람인데 그렇게 환대하여 보내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우리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이며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것을 배워가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관대하고 더 담대하며 더 온유해져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또 우리 삶의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이 되기 힘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복이시라는 사실을 진실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꾸 조급해 지고 욕심을 부리게 되며 또 작은 이익에 너무 민감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빨리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면서 그것을 배워가며 또 확신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날 우리가 그 사실을 진실로 확신하게 되는 때가 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힘들게 한 사람들도 용서하고 선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될 것이며, 그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온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되어서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이 복되게 하셔서 진실로 복되며, 또 하나님을 닮아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