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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2.13. 금요기도회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42)



행0801to08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1(사도행전42).pdf


20131213FE (#01).mp3.zip




* 시간관계상 전반부까지 밖에 설교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금요일에 설교합니다.



본문 : 사도행전 8장 01-08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유명하냐, 얼마나 커다란 업적을 남겼느냐, 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사람을 재고 또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 자신의 인생을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을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성도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반드시 일어나야 할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스스로도 가장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평가기준들은 이미 그 성취정도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나는 환경이 다르고 또 능력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불공평한 기준으로 자기 인생을 평가하는 셈이 됩니다. 다행히 유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불리하게 출발하는 사람들은 그런 평가를 통해서 상처와 실망 혹은 분노 밖에 얻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기준은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평가하실 때 절대로 비교평가를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노전도사님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저를 비교하면 분명히 어떤 점에서는 전도사님이 더 나은 점도 있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제가 나은 점도 쪼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절대평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정해진 각기 다른 채점표를 손에 쥐고서 우리의 삶을 평가하십니다. 스스로 얼마나 자신의 소명에 합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즐거워 하며 살았느냐 하는 것만을 보십니다. 이 기준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장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삶도 이 기준에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기준에서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으며 또 죽음마저도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꾸 우리 인생을 세상의 기준에서 평가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때, 그 때마다 우리는 가장 비참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스데반의 인생을 가장 영광스러운 성공으로 평가해 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순간에도 세상의 평가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바르고 든든하게 세워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자가 되었지만 사실 그 일이 교회에 가져온 여파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스데반이 공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바람에 공회가 독기를 품고 예루살렘 교회를 본격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 그러니까 아마도 이방인이면서 예수를 믿게 된 유대교 개종자들이 슬퍼하며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가장 유능하고 또 가장 경건했던 스데반이 그런 식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니 성도들은 슬플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증인이었던 사울은 공회의 공식허가를 받아서 성도들이 모이는 가정마다 찾아다니며 예수믿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박해를 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데반의 승리는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와해로 이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성경이 3절에서 끝난다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도리 밖에 없을 것이고요. 그런데, 4절은 그렇게 박해를 피해서 여기 저기로 흩어진 성도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히 스데반을 잃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핍박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은 패잔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핍박을 당하고 도망자 신세가 된 일을 교회의 실패와 하나님의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도망친 곳곳에서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답게 생각하고 성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한 번 더 배우게 됩니다.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자신들은 핍박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진 것입니까? 하나님이 실패하고 복음이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일들을 전혀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어려움과 하나님의 실패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두 가지는 전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을 향한 박해와 교회의 흩어짐을 복음과 교회를 위한 가장 좋은 기회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 과장된 힘을 가진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신앙적이고 영적인 시각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나 교회를 바라 볼 때,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시험이 찾아오면 그저 슬퍼하며 움츠러 듭니다. 자신이 복을 받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거의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래서는 믿음이란 것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되지 못합니다. 신앙이란 눈에 보이는 차원이 전부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지식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능력이 되고, 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그런 힘든 일을 연거푸 당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난이 곧 하나님의 실패와 패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자신들이 버림받았다는 증거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우리의 고난이 곧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소망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생각지 못한 승리를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본문을 살펴보면 아주 놀라운 것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어서 성도들이 여기 저리고 흩어져 갔는데, 그 지역이 어디입니까? 바로 ‘유대와 사마리아 온 땅’ 그러니까 이스라엘 전 지역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지명들이 왠지 우리에게 낯익지 않습니까? 어디서 나왔었죠?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사도행전을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인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왔던 지명들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가 사도행전 설교를 처음 시작하면서 사도행전은 결국 이 약속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런지 하나씩 하나씩 살펴볼까요? 첫째 약속대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약속대로 제자들이 권능을 받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세번째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까? 그것도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주님의 이 세 가지 약속이 완전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머지 세 개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온 지역으로 흩어져 갔고 거기서 두루 다니며, 그러니까 아주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네번째와 다섯번째 약속이 그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갈 때, “아! 이제는 끝났다. 교회도 복음도 다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흩어져 가면서, 현실과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흩어져 가는 것은 하나님이 실패하시고 복음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완전히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자신들이 당한 핍박과 도망은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꼭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주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힘 있게, 그리고 더 신나게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아시다시피 스데반과 함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사람이었는데요. 빌립은 사마리아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사마리아 성으로 간 빌립은 거침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충만한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에 충분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크게 역사하셨습니다. 6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빌립이 하는 말을 따랐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곳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동시키셨다는 증거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고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 성에도 성령님으로 인한 새 창조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8절은 그래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그 소외된 성읍, 버려진 사람들의 성읍, 그래서 분노와 절망만이 다스리던 그 땅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큰 기쁨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이 일으키는 일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는 것은 복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변화시킵니다. 아프게 하고 더 상처받게 하는 것 또한 복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큰 기쁨을 줍니다. 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기뻐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을 붙들고 살면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치유되고 우리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정직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됩니다. 사람들이 치유되고 변화됩니다. 그리고 슬픔의 사람, 절망의 사람, 분노의 사람들이 큰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이 일하기 시작하면 말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 그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크게 기뻐하며 큰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성읍이 이런 복을 받고 큰 기쁨의 성읍이 되도록 했던 모든 일들의 시작이 무엇이었습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스데반의 죽음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예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고, 그래서 사마리아에 복음의 기쁨을 선물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죽음이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올바르게 반응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분력력과 순종도 큰 역할을 했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실 때마다 사용하시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신비한 원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은 성도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가져온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에 복음을 퍼지게 하여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 역할을 한 것 또한 스데반의 죽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과정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이유와 동기 까지도 두 죽음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만약 이런 죽음이 씨앗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열리는 열매는 어떨까요? 씨앗이 똑같으니 열매도 같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많은 이들에게 새 새명을 주시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을 이루는 결정적인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똑같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사마리아와 유대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글자 그대로 이루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또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되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원리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방법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이지만 땅에 떨어져 죽으면 수많은 열매가 맺히는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소개해 주셨던 원리이죠. 


흔히들 교회는 선교사들의 피 위에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들의 피가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될 때, 거기서 수많은 또 다른 밀알이 열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일하실 때 사용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는 구속의 계획이 세워진 이후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리는 사실 온 세상을 움직이고 풍성하게 하는 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한 가정이 풍성하려면 누군가는 그 가정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나라가 잘 되려면 그 나라를 위해서 진짜로 헌신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풍성하고 또 행복하며 큰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려면 교회 안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편안함과 유익을 내려놓고 한 알의 밀알이 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언제나 큰 기쁨은 그 기쁨의 씨앗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뜻 자신이 이 밀알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쁨을 위한 씨앗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편하고 그렇게 해야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게 바로 착각입니다. 씨앗이 없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썩어지는 한 알이 없으면 거기서 맺혀지는 많은 열매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도 그 안에서 궁핍하며 나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내가 썩어지는 한 알이 되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구요? 참 어리석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밀알이 썩으면 정말 그 밀알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밀알은 그 밀알을 통해 맺혀지는 수많은 밀알 속에 더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더 풍성하게 살아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영광스럽고 능력있는 도구가 되며 또 그 일의 상급은 고스란히 그리고 영원히 나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도 충분히 나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욕은 먹겠지만 그게 훨씬 이익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늘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전혀 자신의 삶을 내려놓지 않고 살아간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하늘에서 누릴 영광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원래 받았던 한 알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고 살아간 사람들은 그 부분이 씨앗이 되어 맺혀진 열매 들을 하늘나라로 가지고 올라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영광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영원한 상급이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유익을 누린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꺼지지 않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처럼 또 스데반 처럼 십자가를 흉내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한 알 그대로 남겨두는 궁핍한 인생이 아니라 많은 열매들을 위한 씨앗으로 사용할 줄 아는 그런 풍성한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높게 평가하시는 그런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사마리아 성 전체의 구원의 큰 기쁨이 되었듯이 우리 삶의 한 자락이 많은 이들의 기쁨을 위해 뿌려지는 작은 밀알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