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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2.19.새벽예배 -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창세기 101)


창2901to30 -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까(창101).pdf


20131219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9장 01-30절


우리가 어제 살펴보았다시피 하나님은 분명히 아무런 조건 없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끝까지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거절하고 오히려 자기 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조건을 붙여 거래를 제안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자신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을 닮은 모습이었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항상 그 마음에 아담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고 또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도 그 하나님 마저도 자기가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삶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나서 살아가던 아담의 삶을 닮아 있습니다. 똑같은 씨앗에서는 똑같은 나무만 자라날 수 있으니까요. 


29장은 야곱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 즉 우물이 있는지라…” 이상합니다. 원래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고 있었고, 드디어 거기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곳을 동방사람의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동쪽이라고만 말합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의 동쪽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약속의 땅에 있어야 할 그가 약속의 땅의 동쪽으로 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어야 할 아담이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이제부터의 야곱의 삶이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양식을 얻을 수 없었던 아담의 에덴의 동쪽에서의 삶처럼 척박하고 거친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에덴의 동쪽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담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기서도 야곱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이미 약속의 땅에 사는 복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고, 밧단아람은 야곱의 에덴동산의 동쪽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9장은 야곱이 아주 순적하게 삼촌 라반을 만나고 그 딸인 라헬을 아내로 맡아들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틀만 본다면 여기까지의 야곱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만났을 때, 우물의 돌을 치워서 라헬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게 했는데, 당시 우물 입구를 막는 돌은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큰 돌이었다고 합니다. 그 돌 자체가 혼자서 우물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져다 놓은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야곱이 레헬을 만나 라헬의 환심을 사는데 괴력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힘을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또 때마침 목동들과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라헬을 만나게 하셨던 것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야곱을 돕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야곱이 아담을 닮은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엄청나게 사랑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그 이유가 라헬이 곱고 아리따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용의주도한 야곱이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통해서 야곱을 다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천하의 야곱이 한 여인에게 정신이 완전히 팔려서 삼촌에게 속았고 그것을 알았으면서도 결국 14년씩이나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형의 장자권을 사들이고 또 장자의 복을 가로챘을 때는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다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동방사람들의 땅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는 했지만 자신이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처럼 자기도 그대로 당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전혀 도와주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혼 첫날 흥분해서 라헬 대신 레아를 장막 안에 들여보낸 것도 모르고 레아와 함께 잠을 잘 때도 하나님은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똑똑한 야곱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야곱에게 자신의 꾀와 지혜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려주시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속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려주시려는 뜻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다음 날 아침 야곱은 자기 옆에 누워있는 레아를 보고 삼촌에게로 뛰어들어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라고 소리치며 따져 묻습니다. 자신이 7년동안 성심성의껏 섬겼던 삼촌이 자기 딸을 가지고서 자기에게 사기를 치다니 이해할 수도 또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일로 그렇게 속다니 상상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그만큼 억울하고 실망스러웠겠죠.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오래 전에 야곱 자신이 들어야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들어야만 했던 추궁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족을 속이고 실망시킨 것처럼 그 또한 가족으로부터 속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을 얻는 일에서 말입니다. 물론 그가 그 일로 완전히 과거를 뉘우치고 회개하지는 않았지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까?”를 말이 자신의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순간, 그 이야기가 그에게는 형과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려졌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가슴을 찟으면서 말이죠. 


우리는 굳이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을 진짜 자기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는 이전에 고집하던 아담을 닮은 삶의 방식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이 아니라 에덴의 동쪽에서 사는 것같은 거칠고 척박한 삶이 됩니다. 겉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내용적으로라도 그런 삶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서라도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져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야곱과 같은 모습과 습관이 남아 있다면 정말 일초라도 빨리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천국을 향해 순적하게 여행해 가는 순례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