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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2.20. 금요기도회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2(사도행전 43)


행0801to08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2(사도행전4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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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8장 01-08절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과 그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성도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성도는 우선 자신의 인생을 세속적인 기준에 내맡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교만하게 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게 하는 주된 이유가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의 삶이 어떤지를 항상 생각해야 하고 그것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실패자라고 생각해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당당해야 합니다. 또 세상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소리, 세상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해 주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되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해 주시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러면 됩니다. 크든 작든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가장 성공한 인생, 가장 가치있는 인생으로 평가해 주시고 그 평가는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돈을 붙들고, 명예를 붙들고, 자식을 붙들고, 자랑거리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 지를 보면서, 그것을 확인하는 재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재미, 그 능력, 그 기쁨을 알면 다른 것은 크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뭐 가끔씩 조금 아쉽고, 조금 불편한 정도이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전혀 다르게 반응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핍박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은 그것을 실패나 패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와 사마리아 구석 구석으로 도망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고, 가는 곳마다 사람을 구원하며 또 놀라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그 복음의 능력을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을 이루어 가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큰 핍박으로 징계를 내리셔서 여기 저기로 흩어지게 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만약 그것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고, 그래서 그들이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결코 흩어져 가는 곳마다 힘있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 집을 나간 아이가 나가자 마자 노래를 부르며 자기 아버지가 정말 좋은 아버지라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에 진 패잔병들이 개선행진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핍박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그 핍박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악한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놀랍게도 그 악한 일을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이루는 가장 완벽한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나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징계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악한 사람들이 행한 악한 일의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악을 선케 만들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런 악한 일들을 어떻게 선하게 사용하시는지만 깨닫고 거기에 우리의 반응을 맞추어 간다면 우리들 또한 핍박을 능력있는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고 복음이 만들어 내는 승리를 맛보았던 예루살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하면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빌립입니다. 빌립은 소외되고 어두웠던 사마리아 성읍에 복음을 전파하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그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 어둡고 소외된 성읍에 환한 빛을 비추어서 그 곳이 큰 기쁨의 성읍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리아 성읍이 이런 복을 받고 큰 기쁨의 성읍이 되도록 했던 모든 일들의 시작은 놀랍게도 스데반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인생을 보며 또 세상을 바라보았던 성도들에 의해서 한 사람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고 또 많은 사람을 그 빛 가운데 거하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스데반의 죽음을 이렇게 사용하셨을까요? 스데반의 죽음이 사마리아와 유대, 그리고 결국에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출발점이요 촉매제가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아주 놀라운 영적인 원리 하나가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생명이 되며 또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을 바라고 계시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간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리를 배우고 그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스데반이 맺었던 열매와 닮은 열매들이 많이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스데반의 죽음의 모습을 기억해 볼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스데반의 죽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발견했던 가장 중요한 사실이 무엇이었죠?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이유와 동기 까지도 두 죽음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했던 마지막 말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만약 죽음을 하나의 씨앗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뿌린 씨앗과 스데반이 뿌린 씨앗은 똑같은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많은 이들에게 새 새명을 주시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을 이루는 결정적인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똑같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사마리아와 유대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글자 그대로 이루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또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되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원리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방법 또한  언제나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이지만 땅에 떨어져 죽으면 수많은 열매가 맺히는 원리’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또 새 새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소개해 주셨던 원리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교회는 선교사들의 피 위에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실 때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굉장히 궁금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선교사들의 피 위에 교회를 세우실까 하고 말입니다. 사실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 밖에 없는 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가 예수님의 무한한 생명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의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피가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될 때, 거기서 수많은 또 다른 밀알이 열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일하실 때 사용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는 구속의 계획이 세워진 이후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총동원된 곳이기도 합니다. 최고의 지혜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리는 사실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풍성하게 하는 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한 가정이 풍성하려면 누군가는 그 가정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나라가 잘 되려면 그 나라를 위해서 진짜로 헌신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풍성하고 또 행복하며 큰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려면 교회 안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편안함과 유익을 내려놓고 한 알의 밀알이 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언제나 큰 기쁨은 그 기쁨의 씨앗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뜻 자신이 이 밀알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쁨을 위한 씨앗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편하고 그렇게 해야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게 바로 엄청난 착각입니다. 씨앗이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썩어지는 한 알이 없으면 거기서 맺혀지는 많은 열매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내 몫으로 주어질 열매도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도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썩어지는 한 알이 되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구요? 참 어리석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밀알이 썩으면 정말 그 밀알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밀알은 그 밀알을 통해 맺혀지는 수많은 밀알 속에 더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더 풍성하게 살아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영광스럽고 능력있는 도구가 되며 또 그 일의 상급은 고스란히 그리고 영원히 나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나만 생각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욕은 먹겠지만 그게 훨씬 편하고 간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전혀 자신의 삶을 내려놓지 않고 살아간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하늘에서 누릴 영광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원래 받았던 한 알 밖에는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라도 씨앗으로 뿌리며 살아갔던 사람들은 바로 그 씨앗에서 맺혀진 열매들을 하늘나라로 가지고 올라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그의 영광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영원한 상급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누리는 예수님의 영광이 가장 크고 빛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내려놓고 이 땅에 내려오셨고, 그 분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뿌리며 살았던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처럼 또 스데반 처럼 십자가를 흉내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한 알 그대로 움켜쥐고 살아가는 궁핍하고 인색한 인생이 아니라 많은 열매들을 위한 씨앗으로 뿌릴 줄 아는 그런 마음 넉넉하고 풍성한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높게 평가하시는 그런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겨울, 주님의 계절에 십자가의 영광스럽고 가장 풍성한 삶의 원리를 마음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많이 뿌리고 더 많이 심기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그 넉넉하고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시 한 번 결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십자가를 닮은 삶이 될 것이고 많은 열매로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이 될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사마리아 성 전체의 구원의 큰 기쁨이 되었듯이 우리 삶의 한 자락이 많은 이들의 기쁨을 위해 뿌려지는 작은 밀알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