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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2.26.새벽예배 -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창세기 104)


창2931to35 -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창104).pdf


20131226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9장 31-35절


라반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야곱에게 두 딸을 모두 떠 넘겼습니다. 그것도 계산해 보면 당시를 기준으로 두 배의 결혼 지참금을 받고서 말입니다. 장사로 치면 참 대단한 장사를 한 셈입니다. 아마도 라반은 그렇게 두 딸을 한꺼번에 시집 보내면 그것으로 다 될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이익이고 딸들도 행복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계산착오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동생인 라헬은 사랑했지만 레아에게는 정말 아무런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레아는 야곱이 삼촌에서게 속아서 억지로 떠 안은 짐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게다가 레아와 라헬은 자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매가 한 집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두 사람에게도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옛날 우리나라처럼 꼭 사랑해서 결혼하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저 사랑 없이 결혼한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입니다. 이미 갈등과 원망, 그리고 질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이 한 집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야곱이 레아를 싫어했다고 해서 그것을 제대로 표현했겠습니까? 아니면 라헬을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놓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야곱은 자기 부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일 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레아를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레아에게는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레아의 태를 먼저 열어주셨고 레아에게서 야곱 집안의 장남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아무튼 레아가 먼저 야곱의 아내가 되었고 게다가 장남도 낳았습니다. 둘째도 낳게 하셨고 셋째도 낳게 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자랑스러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봐라! 아들이다!”라는 뜻의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아마도 레아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이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봐라! 그래도 아들은 내가 먼저 낳았다.”라고 라헬을 향해 소리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첫 아들을 낳았어도 야곱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는 어떻게 보면 참 한이 서린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들을 주셨다는 뜻을 담아서 들어셨다는 뜻의 ‘시므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레아는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하나님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사정을 헤아리신다”고 가슴 아픈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 번째 아들도 레아가 낳게 하셨습니다. 레아는 아직 라헬이 자식을 하나도 낳지 못했는데 자신은 아들을 셋씩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틀림없이 야곱이 자기 쪽으로 기울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과 부부로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아들을 연합이라는 의미로 “레위”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까지도 야곱은 레아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레아의 잘못은 아닙니다. 만약 라반이 라헬보다 레아를 나중에, 순적한 방법을 통해 아내로 주었다면 레아는 이렇게 까지 괄시를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레아가 이런 괄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 라반 때문입니다. 라반이 자기 욕심만 차리려고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레아의 고통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들을 셋이나 낳을 때까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또 하나 더 주셨습니다. 그런데, 네번째 아들을 낳은 후 레아의 태도가 갑자기 바뀝니다. 레아는 갑자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한 후에 네번째 아들의 이름을 찬송이라는 이름으로 “유다”라고 붙여 주었습니다. 세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 레아는 그 아이들을 남편의 사랑을 얻는 일과 연결시켰습니다. 물론 번번히 그의 생각은 빗나갔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아들을 낳고는 그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얻는 일과 상관없이 하나님만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그 이전과 이후에 레아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레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통해서 남편의 마음을 얻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하나씩 줄 때마다, 이제는…, 이번만큼은…, 이번에는 반드시… 하면서 그것을 야곱의 사랑을 얻는 일의 통로로 여겼죠. 그런데, 네번째 아들은 낳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녀를 주시는 이유가 야곱의 사랑을 얻게 하시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녀를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물론 그게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얻고 못 얻고 하고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배경에서 여인이 자녀를, 그것도 아들을 잘 낳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큰 복을 받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자신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서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큰 복을 주고 계시고,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아의 태를 먼저 여시고 그에게 먼저 아들을 주셨던 것, 그것은 야곱의 마음을 레아에게로 돌리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레아에게 베풀어 주신 크고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아들을 넷이나 낳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레아의 출산을 멈추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또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충분히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것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눈이 가리워 지고 또 마음의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보면 저도 자주 자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분명하게 마음에도 그렇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셨는데도 제가 채워지지 않은 한 가지만 생각하느라고 그 모든 감사와 기쁨을 놓친 일이 참 많았습니다. 저 자신에게 빠져서 저 보다 큰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도 충분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고 절실한 필요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과 필요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을 크게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채워지지 않는 필요 때문에 하나님을 놓치고 또 이미 부어주고 계시는 은혜와 사랑을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상황이 주는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나갈 것입니다.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런 복과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