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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2.29.주일오전 -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마가복음 57)



막1218to27 -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마가57).pdf


20131229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2장 18-27절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거기서 정말 귀한 음식을 대접받았는데, 그게 정말 너무 너무 맛있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맛이 너무 인상 깊어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자녀들에게 감탄을 하면서 “얘들아, 아빠가 오늘말야. 정말 정말 맛있는 거 먹었는데. 야! 정말 그거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맛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첫째는 “아빠, 그게 소불고기보다 맛있어?”라고 말했고, 둘째는 “아빠, 그게 사탕보다 맛있었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하나는 그것이 소고기 구이 보다 맛있냐고 물었고, 하나는 사탕보다 맛있느냐고 물었을까요? 하필 왜 그것과 비교하면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것은 첫째는 자기가 먹어본 것 중에서 소불고기보다 맛있는 것이 없었고, 둘째는 사탕보다 더 맛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에게는 소불고기와 사탕이 가장 맛있는 음식하면 생각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일은 절대로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인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건, 아니면 나중에 알게된 것이건 ‘개념’이라는 것을 통해서 생각하거나 혹은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각하고 또 상상하는 수준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의 수준을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전 큰 은혜를 경험해 본 적이 없고, 그 은혜 때문에 정말 자다가 깰 정도의 기쁨과 만족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그저 그런 일로 생각합니다. 신앙은 그냥 마음 속에 있는 신념과 비슷한 것이고, 필요할 때마다 위로를 얻거나 힘을 얻는 것이 신앙이 줄 수 있는 유익의 전부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한 번이라도 큰 은혜를 경험해 보고, 믿음의 기쁨과 능력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들은 항상 그런 은혜를 그리워 하며, 더 온전한 믿음을 위해서 애쓰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서도 자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곤 합니다. 다 영적인 체험을 통해 생겨난 참 신앙에 대한 개념이 있느냐 없느냐가 만들어 내는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신앙에는 직접적인 체험말고도 믿음이라는 깨달음의 통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생전 제대로 된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면 순간에 하늘의 영광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큰 은혜로 근심과 걱정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기대하려면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우리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항상 내가 신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내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비록 지금 나는 모르지만 내가 지금 상상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세계가 믿음 안에 있다는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내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은혜와 신앙에 대한 ‘개념’에만 머물고 그것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빈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신앙 자체를 크게 잘못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은 ‘보수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꼭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아주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수가 돌처럼 굳어버린 보수가 될 때는 우리의 신앙과 사고방식은 그만큼 좁은 틀에 갇히게 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런 길을 갔던 대표적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여호수아 이 다섯가지 책에 명확하게 나온 것들만을 신앙의 내용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8절을 보면 이들을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라고 소개하는데요.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모세오경에는 부활에 대한 명확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활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사실 그 당시 모든 유대교의 다른 종파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세오경만 인정하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아주 요상한 말도 안되는 질문 하나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이것은 수혼법이라고 부르는데요. 지금의 우리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법이지만 이것이 율법 중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법을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산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 특별히 땅은 결코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자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가문과 가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유의 상속물로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남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땅은 그 다음 대에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수혼법은 일차적으로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그렇게 주인이 없어진 땅 때문에 생겨날 친족들 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남겨질 미망인들의 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법이었습니다. 


이 법 자체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만약 이것이 부활과  맞물리게 되면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질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다른 유대교 사람들과 논쟁을 할 때는 꼭 이 문제를 들고 나와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비아냥 거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똑같은 목적에서 였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들이 들고 온 질문은 어떤 사람이 형제가 일곱 명인데, 첫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서 둘째가 그 형수를 취했는데 둘째도 그 여인에게 자녀를 얻게 해 주지 못하고 죽었고, 나머지 다섯 명 까지 일곱 명 모두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면 나중에 모두가 다 부활하게 되면 과연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는 사두개인들을 조금은 한심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자신들만이 정통이고 자기들만이 보수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똑똑하거나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무지와 불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야 말로 진리의 수호자이며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채로 그런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들이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면 이들의 신앙은 도대체 어디에 기초한 것이었겠습니까?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 중의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오경 위에 세워져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아무 기초도 없고 근거도 없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사두개인들을 닮아 있습니다. 그 신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 위에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성도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을 믿고, 자기 상식을 믿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어도 자기 생각을 바꾸려 들지 않고 또 거기에 자기 삶을 맞춰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신앙이 하나님과 성경에 기초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알고 있는 대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 참된 신앙이 되려면 그 신앙은 반드시 바른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위한 하나 밖에 없는 바른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으며, 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을 때, 거기서 바른 믿음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을 믿으시죠?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한 것인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정말 다른 것입니다. 유럽에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성경에서 기적들을 다 빼버리거나 아니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바꿨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오천 명의 사람들이 가져온 도시락을 모두 모아서 나눠 먹었더니 그렇게 되었더라라는 이야기로 각색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자기 머리 보다 작게 만든, 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었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오늘 성도들의 신앙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그런데 믿어지는 부분만 믿습니다. 이해되는 부분, 받아들여지는 부분만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반드시 꼭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 이것을 정말로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입니다. 전능이란 무엇입니까?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바로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만드셨죠? 그저 말씀으로, 명령으로 만드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불가사의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부가 다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우주, 우리가 사는 지구,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심연, 높은 산맥들, 수많은 짐승들, 헤아릴 수도 없고 그 종류를 알 수도 없는 곤충과 미생물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있게 된 것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 아니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의 출발점입니다. 만약 이런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놀라운 기적들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만 하신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언제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만약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필요가 없고 그런 하나님은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에 어딘가는 부족한 분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항상 불안한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그런 이상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겨우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무지에서 나온 오해를 이렇게 교정해 주십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어떤 분들은 이 말을 또 오해해서 하늘나라에 가면 가족끼리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부부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는 것은 결코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눈을 감고 하늘에서 눈을 뜨면 머리가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기억들을 가지고 갑니다. 그 기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기억이 다 사라져 버린다면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 뿐만이 아닙니다. 관계도 그대로 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가족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또 광현교회의 성도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서로 잘 해야 합니다. 나중에 미안해 하고 부끄러워 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서로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 하고 최대한 존중하고 사랑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 땅에서 죄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망가지고 어그러졌던 관계들이 그 나라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관계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 이 땅에서 맺었던 그런 관계들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때가 되면 땅에서 맺었던 관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온전하고 풍성한 관계 속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주님은 부활하게 되면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부활한 우리들은 여전히 우리 자신이지만 지금 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천사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피조물을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천사처럼 되는데, 아니 천사 이상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데 그 때도 상속재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 저런 제도와 관계가 필요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은 질문할 꺼리도 문제가 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저는 종종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속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빨리 다시 오시면 좋겠습니까? 천국이 빨리 임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이 첫번째 질문을 던져 보면 한 반쯤은 머뭇 거립니다. ‘빨리’라는 말에 걸리니까요. 제가 다시 묻습니다. “지금 당장 오시면 좋겠습니까? 지금 당장 천국에 가시면 좋겠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러면 한 3분의 2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왜냐고 물으면, 많은 분들이 “아직 여기서 행복을 누리지 못했는데요. 결혼도 못했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대답인 즉, 여기가 좋으니, 또 여기서 누릴 즐거움이 남아 있으니 여기 조금 더 머물다가 가겠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오셔도 그 때 오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대답이 나올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과 행복을 이 땅에서 얻을 행복이나 결혼이 주는 만족보다도 못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늘나라에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항상 즐거움과 기쁨만 있다고 하니 그러면 하늘나라가 지루한 곳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늘나라에 가기 싫다고 말합니다. 모두들 자기의 낮은 수준으로 하늘나라를 이해하려고 하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이런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제대로 몰랐고 그래서 오해했던 것은 하나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그러니까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붙들고 있었던 모세오경 자체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어떻게 모세오경만 성경이라고 인정하던 사람들이 모세오경에 대해서 무지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있다는 것, 아니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면서 성경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구절 하나를 인용하셨습니다. 그 구절은 호렙산의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우리 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인용하셨던 창세기 말씀을 느낌을 살려서 다시 한 번 적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지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지금 이삭의 하나님이고, 지금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만 놓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현재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죽은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으시고 오직 산 사람하고만 상관있는, 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모세가 이 말씀을 듣기 한참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까? 그가 죽었는데, 어떻게 산 사람들의 하나님만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아브라함이 부활하면 됩니다. 아니 부활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다. 동일한 이치로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실 수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다면 부활은 당연히 가능할 수 밖에 없고 또 믿을 수 밖에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그들은 모세오경을 달달 외우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 말씀 속에 부활에 대한 진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리고 왜 그것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 말씀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알아야만 얻을 수 있는 믿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진짜로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의 내용을 알거나 혹은 성경구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그렇게 알기만 해도 괜챦은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창세기 1장 1절과 같은 종류의 말씀들이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보이는 게 전부입니다. 물론 이 말씀 또한 진짜로 믿어야 하지만 그 내용 만큼은 더 이상 파고 들어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말씀들은 그렇게 알아서는 절대로 제대로 알 수 없는 가려진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의 경우에는 정말 세심하고 정확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진짜 뜻과 가려진 뜻을 캐내야 하고, 그 뜻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아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냐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두개인들처럼 됩니다. 껍데기는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없는 그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다 알고 있고 다 믿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사두개인들의 신앙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도 잘 모르고 또 성경도 잘 몰라서 그저 자기 생각, 자기 상식, 자기 논리만 붙들고 사는 그런 사람, 오해로 가득 찬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불교나 혹은 미신적인 종교들은 신심, 그러니까 믿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만, 기독교는 신심만 가지고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경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 뜻과 의지를 더욱 더 깊이 알아가야 하며, 성경의 진리를 더욱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두개인들처럼 자기 안에 갇힌 신앙을 벗어날 수 있고, 진리가 자신을 자유케 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게 되고, 그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스스로 능력과 여건이 되시는 분들은 꼭 성경에 대한 좋은 책들을 읽으시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성경 속에 있는 진리들을 캐내시고 그것을 여러분 믿음의 내용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분들은 최소한 듣고 배우는 일에라도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적어도 설교를 듣고, 교리강좌를 듣고, 또 성경공부를 할 때 만큼은 관심이 조금 없더라도, 제대로 들리지 않더라도 들으시려고 기를 쓰셔야 합니다. 방법이나 통로는 달라도 성도라면 하나님을 알고 또 성경을 알고자 하는 배우려는 욕구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알고 배우려는 욕구가 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결국에는 자기 안에 갇히게 되고, 또 신앙은 오해로 가득한 신앙, 능력이 없는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이 한 해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히 그 중에는 그 시간만큼 하나님을 더 알고 또 진리를 더 알아가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또 진리를 아는 일에서 성장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이 성장하신 분들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에게는 또 한 해가 또 한 번의 기회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더 하나님을 알고 또 성경을 아는 일에서 더 성장해 가기로 결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진지하게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애쓰고, 한 줄이라도 더 성경을 묵상하기 위해 힘쓰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힘쓰자고 말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또 성경을 아는 일에서 더 큰 열심을 내어서 더욱 더 든든한 신앙, 그리고 더 풍성하고 오해 없이 분명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