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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08. 특새 3.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산상수훈 3)


3.마0521to27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pdf


20130108D (#01).mp3.zip






설교본문 : 마태복음 5장 21-27절


우리나라는 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이 되면 곱셈을 배우기 위해서 구구단을 외웁니다. 인도에서는 십팔단을 외운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보다 인도의 교육수준이 훨씬 높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조금 교육열이 뜨거운 부모들이 이 십팔단을 외우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육하면 떠오르는 네덜란드에서는 아얘 이런 계산의 공식을 외우지 않게 합니다. 스스로 더하기의 원리를 사용해서 곱셈을 터득하게 한다고 합니다. 시간은 훨씬 오래 걸리지만 그 과정에서 저마다 자신만의 계산방식을 계발해 내게 되고 또 지능도 그저 정해진 공식을 외울 때보다 훨씬 더 잘 발달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방식의 수학교육이 수준이 더 높은 이유는 학생들을 커다란 원리를 가르쳐 주면 나머지는 스스로 터득할 능력이 있는 그런 존재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딱 정해진 것을 좋아합니다. 무슨 비결이니, 무슨 방법이니 해서 무엇을 하기 위한 정해진 방법을 알고 그것대로 따라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좋은 점도 있습니다. 간단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또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것을 신앙에서도 요구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에서 마음과 정신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우리를 가르칠 때, 한국이나 인도의 방식이 아니라 네덜란드식으로 가르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정해진 규정이나 비결이 아니라 넓고 큰 원리들을 가르쳐 주고 그 안에서 스스로 성숙해 가도록 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산상수훈을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규칙을 기록한 모음집 정도로 생각한다면 산상수훈을 또다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오해하고 잘못 가르친 율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묵상하는 내내 꼭 기억해야할 두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제 본문에 나왔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신 말씀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또 잘못 가르쳤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망가진 율법을 고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찾아진 율법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가진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물론 진짜로 그 율법을 율법답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려면 아직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과 내일 살펴볼 본문은 크게 다섯 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다른 것들은 다 놓아두고서 이 다섯 가지만을 가르치신 이유는 이 다섯 가지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잘못 해석되고 잘못 가르쳐진 대표적인 것들이고 그래서 이것을 샘플로 삼아 원래의 전체 율법을 되찾아서 가르쳐 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 하나 다 들추어 내서 모든 것을 다 바로잡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대표적인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바른 원리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스스로 전체 율법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어린아이로 다루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조목 조목 가르치고 외우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큰 원리를 가르쳐 주고 그 안에서 스스로 고민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원리를 가르치지 않고 고민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딱 정해진 비결같은 것만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굉장히 친절하고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이 왔다는 것은 몽학선생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면서 성숙해 가도록 양육합니다. 


주님은 제일 먼저 다루신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21절 이하에 나오는데요.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21절에 나오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는 말은 사실 “옛 사람들에 의해서 말해진 바…”라고 번역해야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본다면 양쪽 모두로 해석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이상해 집니다. 우리 말 성경대로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완전히 틀린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옛 사람’들이란 랍비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해진 바’란 그들이 잘못 가르친 내용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일반백성들은 구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오랫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그저 율법학자들이 해석해서 가르치는 대로 듣고 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가르침이 빗나가는 바람에 백성들 또한 그 율법을 잘못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틀린 것 하나 없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3절과 14절에 나와있는 대로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지방의 법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옛 랍비들과 그 랍비의 뒤를 따르는 당시의 율법선생들은 살인에 대해서 가르칠 때 그저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게 되면 지방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런 가르침 속에는 율법의 가장 깊은 차원, 죄의 가장 깊은 차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만 가르치면 율법은 다른 나라의 일반 법률과 똑같아 집니다. 사람을 죽이면 재판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야 어느 나라 법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죄라는 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것이지만 사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깨뜨리게 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고, 또 그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이니까요.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살인이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가장 깊은 의미는 보여지는 조항이 아니라 그 조항이 담고 있는 정신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진짜로 금하신 것은 무엇이었고 또 진짜로 요구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신 것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사람을 멸시하거나 또한 그 사람이 나를 원망하거나 멸시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옛 사람들은 살인하면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루신 문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분노하는 문제와 또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목하는 문제였고 또 다른 사람에게 입힌 손해를 갚아주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되찾아 주신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진짜 의미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치워야 하며,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장벽을 치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간음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저 “간음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그저 마음에 더러운 마음을 품고 이성을 바라보는 것도 간음이며 당시의 관습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던 이혼과 이혼 후에 쉽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까지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이란 사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인격체를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저 더러운 마음으로 이성을 바라보는 것이나,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배우자를 버리는 것과 너무 쉽게 다른 배우자를 찾는 일까지도 똑같은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가르침 속에도 사람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단지 그 대상이 이웃이나 미워하는 사람에서 이성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율법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그 사랑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신 것이며, 우리가 그 율법 안에서 미워하지만 않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된다는 원리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대하면서 주신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으며,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 하나의 규칙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서로를 사랑하려고 애쓴다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몽학선생 밑에 있는 미숙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그 분의 참 자녀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서로 미워하고 해를 입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 너머에 있는 진짜 정신들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서 생각하시고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 갈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나머지 말씀들은 내일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시고, 또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된 하늘백성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