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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09. 특새 4 - 너희도 온전하라(산상수훈 4)




4.마0533to48 - 너희도 온전하라.pdf


20140109D (#01).mp3.zip





설교본문 : 마태복음 5장 33-48절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잘못 이해되고 또 잘못 가르쳐진 율법, 그래서 하나님이 빠져 버리고 사람의 열심과 의만 남은 그런 율법을 제대로 고쳐 주십니다. 어제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 보았는데요. 오늘은 나머지 세개의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살인과 간음에 대한 율법선생들의 가르침을 바로 잡아 주신 다음에 세번째로 바로잡아 주신 가르침은  ‘맹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선생들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헛된 맹세를 하지 말고 혹시 맹세를 했다면 그 맹세를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한다고만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맹세에 대한 모든 조항들을 가장 짧게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율법선생들은 맹세를 지키라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맹세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맹세가 난무했습니다. 하나님을 빼놓고 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를 했고, 자기 자신을 걸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얘 그 무엇으로도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과 땅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깃들어 있으니 거기다 무엇을 걸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고, 심지어는 자신의 머리털 한 알에 대해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는 것에다 맹세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맹세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이 맹세를 하는 많은 경우, 자신의 말이 거짓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맹세를 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비록 그의 의도가 선하고, 또 그 당시에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아도 결국 인간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상대방을 속인 것이 되고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또 손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를 아얘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맹세를 금하시고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만 하셨습니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진실을 주장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의 전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을 함에 있어서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맹세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덧붙여 지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게 하고 그래서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을 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말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 하려면 정직하게, 그대로만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헛 맹세만 하지 않으면 되고, 맹세를 했다면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을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맹세라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자신의 인격이 깃들지 못하게 하며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 또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절대로 맹세를 하지 않고 맞다 아니다라고만 하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 말을 신뢰한다면 이 사람은 과연 평상시에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살았던 사람일까요? 분명히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말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진실할 때, 우리가 다른 이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교훈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인즉 우리가 우리의 말을 사람들을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면 우리가 그 말을 정직하게 해야할 뿐만 아니라 삶도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맹세를 금하신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다루신 것은 복수법이라는 불리는 것입니다. 가장 짧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라고 요약되는 율법입니다. 얼핏 보면 이 율법은 마치 똑같은 것으로 갚아줄 권리를  보장해 주는 율법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선생들은 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해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권리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법을 율법 속에 넣어 놓으신 것은 과도한 복수를 방지하는 안전장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권리를 규정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복수의 상한선을 규정한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시면서 진짜로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손해 입은 것을 되돌려주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 그리고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39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제시해 주시는 가장 큰 원칙은 일단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주면서 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기까지도 정말 어렵지만 그 다음부터는 정말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부터는 나를 괴롭히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두 배를 해 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는 새로운 율법 규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손해를 손해로 돌려주지 않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손해를 손해로 돌려주지 않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를 달라고 하면 둘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살면 적어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사랑에 대해서 유일하게 가르친 내용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구약성경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왜곡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구약을 달달 외우는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전혀 그만둘 수가 없으니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니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마음껏 미워해도 괜찮은 사람들이 되었고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심지어 개취급 하면서도 전혀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율법선생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 그것도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웃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원수도 박해자도 다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사랑해야 하고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해와 비를 공평하게 주시는 분이신데, 그 분의 자녀라면 당연히 그러한 아버지를 닮아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게다가 만약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들, 사랑할만한 이유가 있고 또 사랑하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죄인으로 규정하는 세리들과 개처럼 취급하며 멸시하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녀의 모습이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닮은 자녀에게만 주시는 상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 담아서 주셨던 하나님의 진짜 바램을 깨닫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저 사랑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으라는 초청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결론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바로 잡아 가르쳐 주신 다섯 가지 율법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정신이 사랑이고 그래서 사랑하지 않고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원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주신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그 분의 사랑입니다. 죄인도 사랑하시는 사랑, 악인과 선인에게 공평하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닮으려면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을 흉내 내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온전한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이웃들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랑을 흉내 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갈까요? 그것은 바로 팔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 하늘 백성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혼자로 충분한 사람, 스스로 의로운 사람,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 마음이 나뉜 사람, 이리 저리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 땅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런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요. 


온전한 율법은 우리에게 하늘 백성의 마음을 품고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사랑 가득한 착한 행실로 우리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라고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지우시고 그 자라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새겨 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율법을 이룰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아버지를 닮아가는 영광스러운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백성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심어주셔서 사랑하며 온전해져 가는 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