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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1.10.금요기도회 - 그 길은 광야라(사도행전 45)


행0826to40 - 그 길은 광야라(사도행전4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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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8장 26-40절



제가 대학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정말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항상 하던 대로 성령님께서 지혜와 담대함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놓으신 영혼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 후에 거리로 나섰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주며 거리를 걷던 중에 극장 앞에 보도에 앉아서 껌을 팔고 계시는 체구가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분에게도 전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참 사람들을 향해서 껌을 사달라고 하는데 괜히 장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는 틈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 교회에 다니세요?” 저는 그렇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께서는 그 말 한 마디에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에게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던 사람이 없었어. 교회에 가자고 한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교회에 못 나갔어.”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할머님을 그 다음 주일날 교회 앞에서 만나서 교회에 등록을 시켜 드렸고, 또 나중에는 갈 곳이 없어지셔서 교회 여전도사님과 연결시켜 드려서 교회에서 운영하던 양로원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지금도 전도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분의 눈문을 흘리시는 얼굴이 떠오르고 또 교회에 나오셔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데 갑자기 그 오래전에 경험했던 그 일이 오늘 본문과 겹쳐져 떠올라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렸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닮아있어서 그랬던 것같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유는 이 이야기는 복음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서 드디어 땅끝으로 전파되기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이 이방인이면서 유대교를 믿었던 에디오피아의 고관을 전도하여 복음을 믿게 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당시에 로마와 더불어 땅끝이라고 불려지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북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였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기까지 직접 간 것은 아니더라도 그가 복음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복음이 땅끝으로 전파되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고, 게다가 이레니우스라는 사람이 2세기에 기록한 책을 보면 이 관리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선교사가 되었다고 하니 복음은 확실히 땅끝까지 전파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우리들의 믿음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우리의  생각보다도 빠르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남아있는 주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전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 약속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모든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며, 우리를 주님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할 것이고 함께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모든 약속들을 생각하면서 남겨진 모든 주님의 약속들 또한 분명히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성경에 쓰여진 첫번째 목적이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면, 두번째 목적은 우리에게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일이 때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엄청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얼마든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단 한 사람을 전도했지만 그 일이 바로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단 한 사람을 전도했지만 그를 통해서 에디오피아에 전체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지금도 에디오피아는 45퍼센트의 인구가 에티오피아 정교라는 기독교의 한 종파를 믿고 있습니다. 개신교 인구도 상당수 있고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와 또 거기 기울이는 노력들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사용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이것 말고도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일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진리도 담고 있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이 기록된 순서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에서 빌립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빨리 가라고 하였고, 빌립은 거기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빌립은 기도 중에 자신에게 들려온 천사의 목소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천사의 요구는 굉장히 이상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만큼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인도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광야길로 가라고만 했지 정확한 위치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답부터 말씀드린다면 빌립은 평상시에도 굉장히 민감하고 정확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가 왜 거기로 가야하는지 그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즉시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빌립이 자신이 거기까지 가야만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은 어딘지도 분명치 않은 그 길 어딘가에 도착하고 나서 거기서 에디오피아의 관리를 만나 그가 이사야서를 소리내어 읽고 있는 것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할 사람들,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영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분명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서, 그리고 상황 속에서 자신을 향한 특별한 요구가 있을 때,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시간과 노력을 엉뚱한 곳, 심지어 잘못된 곳에 쏟아붓는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별력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은 그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첫째, 그는 성령충만했습니다. 삐딱하게가 아니라 제대로 성령충만 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지혜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자신을 믿지 않았고, 계속해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함과 겸손한 기도가 그가 가진 영적인 분별력의 기초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안됩니다. 성도는 계속해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 지기 쉽고 그러면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고 믿는다면 거기에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빌립에게 그 이상하고 외딴 장소, 사실 어딘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광야 어딘가로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그런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라고 하시니 갔습니다. 그것은 빌립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하다면 그 다음에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도 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서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시키십니다.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냐고 묻죠. 왜 하필이면 여기고 하필이면 그 일이냐고 묻습니다. 물음이기는 하지만 실은 물음이 아니라 추궁이고 반항입니다. 만약 이런 질문이 사라지지 않고 그리고 이런 질문이 걸림돌이 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커다란 방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왜냐고 물어도 하나님께서는 거의 대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서 순종하면 그 답은 저절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구에 온 지 올해로 만 10년이 되는데요. 저는 대구에 올 때까지 대구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대구에 내려오는 일이 결국에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굉장히 비판적인 사람이고 야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생각이나 사상도 보수적이기 보다는 굉장히 개혁적이고 자유분망한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정치적인 것을 너무 너무 싫어합니다.  전형적으로 중산층 이하에 속하는 젊은 서울 사람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제가 대구라는 도시에 잘 어울릴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저는 대구에서 살던 중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대구에서는 담임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었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를 떠나서 저도 그렇고 또 제가 돌보아야 할 성도들도 그렇고 괜히 서로 오해하고 힘들어질 수 있겠다 싶어서 였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조금 더 흘렀습니다. 이제 담임목회지를 알아보아야만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대구에 있는 교회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도 대구에 있기 싫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구에 있는 몇몇 교회에 연결이 되어서 지원서류를 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발적으로 찾은 것도 아니라 요청이 들어온 것이니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서 그 요청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이유로 청빙을 받지는 못했지만 서류는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문득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 교회들 중의 한 곳으로 저를 보내시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반복되는 일들을 통해서 “너 대구가 싫다고 했지? 그런데, 너 내가 너를 대구에 있으라고 하면 대구에 있을 수 있겠니? 나에게 순종할 수 있겠니?”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지원서류를 내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을 바꾸어서 “대구에 있으라시면 있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들려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 여러분과 함께 평안하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저의 성향 때문에 가끔은 대구라는 도시가 편치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하나님께 왜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신뢰하는 하나님께서 저를 여기 두셨다는 것만큼은 확신하고 있고, 그래서 분명히 여기 대구에서 무언가 제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예를 들어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누군가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해 내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겠다”는 마음은 꼭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고, 또 순종하게 되더라도 자꾸만 떠오르는 “왜?”라는 질문 때문에 맡기신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삶의 자리에 있게 되는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신다고 한 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시지 않는 것은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거기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연습을 시키시기 위해서 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어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해하기 힘든 인도하심에 대해서도 왜냐고 따지지 않고서 순종할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기대치 못하던 곳에서 전혀 기대치 못했던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하시겠다던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땅끝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빌립의 영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을 향한 단순하고 확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성도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맡게 됩니다. 그 일은 특별할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으며, 큰 일일 수도 있고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크기와 종류를 막론하고 그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맡기신 분의 영광을 위해서, 그 분의 목적에 맞게 감당하려면 우리에게는 항상 성령충만함과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단순하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확한 뜻은 처음부터 주어질 때도 있지만, 빌립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 보니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분별력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그저 일상생활을 하든지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혼란스럽고 확실치 않은 추측들로 채워질 수 밖에 없고, 또 불안한 걸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도 제대로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저 믿고 따를 정도로 하나님을 철석같이 신뢰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위한 신실한 종들로 쓰임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