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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1.12.주일오전 - 이스라엘아 들으라(마가복음 58)



막1228ro34 - 이스라엘아 들으라(마가58).pdf


20140112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2장 28-34절



어떤 사람에게 바른 말을 해 주면 그 사람이 그 말이 바른 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것 같지만 실제로 바른 것을 그저 바르기 때문에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자질이 꼭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어떤 것이 더 옳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이 분별력이 없을 때 사람은 무엇이 더 옳고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아무리 옳은 것을 들려주어도 그 옳은 것을 옳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옳은 것을 분별하는 힘은 건전한 상식과 윤리, 그리고 차례를 밟아서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얻을 수 있는데 생각보다 이런 것들 중에서 하나나 혹은 몇 가지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뻔히 옳은 것인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두 번째 자질은 인격적인 것인데 그것은 바로 정직함입니다. 정직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옳은 것을 분별해 놓고도 적어도 겉으로는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치가들이나 논객들의 TV 토론을 볼 때, 그들이 뻔히 옳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분별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입장과 이익이 정직함보다 앞서기 때문에 사실은 스스로도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 옳은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을 찾아와 권위의 문제를 따졌던 사람들, 그 후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그리고 부활문제를 들고 거만하고 냉소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사두개인들이 다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중 적어도 앞쪽의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옳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첫번째 자질은 갖추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두 번째 자질, 그러니까 정직함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옳은 줄은 알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했고 또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에 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아얘 첫번째 자질도 부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얘 처음부터 부활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을 부릴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찾아갔던 서기관, 아니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의 논쟁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 서기관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가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던 이유를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 알고”라는 말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실력과 지혜를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수로서 고수를 알아보고 그것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살려 굉장히 중요한 문제 하나를 질문해 보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계명의 숫자를 613개로 제시했는데, 서기관의 질문인 즉 그 중에서 가장 무겁고 중요한 계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을 들려달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직접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여기까지의 예수님의 대답은 신명기 6장 4-5절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인데요. 이 말씀은 율법의 계명 중의 하나가 아니라 ‘쉐마’라고 부르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신앙적인 표어로 삼아야만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단지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해 주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이 구절들 전체를 인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뒷 부분만을 따와서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말씀도 가져 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들려주어야 할 대답의 앞부분에 가져다 넣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실은 ‘쉐마’의 앞부분의 내용이 뒷부분의 명령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면, 또 우리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라는 진리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는 곳이 많이 나옵니다. 호세아서는 아얘 호세아와 그의 아내인 고멜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 중에서 부부관계보다 더 독점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갑자기 그 남편이 한 여자를 데리고 오더니 “자, 이제 두 사람이 경쟁해 봐. 누가 내 사랑을 더 받게 될지.”라고 제안한다면 그 여인은 그 남자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거 좋겠다. 정말 재미있겠는데. 한 번 해 보지 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 여인은 제 정신이 아니든지 아니면 그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데 다른 것과 경쟁관계에 계신 것을 가장 못 견디어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 신들 중의 하나라면, 또 여러 피조물들 중의 하나라면 하나님께는 이럴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들과 아름다움이나 가치, 그리고 그 다른 면에서도 비교평가가 가능한 분일 테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 밖에 없는 주님이시며,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어떤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는 경쟁상대가 되질 못합니다. 또 완전하신 분이시고 가장 아름답고 알기만 한다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분이시며 모든 가치의 꼭데기에 계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한 분 밖에 없는 우리의 주님이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과 하나님을 비교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함께 사랑하는 것도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 사랑으로, 그것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이상해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 아내나 남편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 자녀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친구나 동료, 연인,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때, 다른 모든 부분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의 타락의 본질은 일그러진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가져다 놓고 자신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려고 했던 것이 인간 타락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우선순위가 무너지니 나머지 삶의 질서들도 깨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부터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문제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대상이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의 첫단추라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끼워져야 하는 첫번째 단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서기관이 계명 중에 첫째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정말 모든 것을 다해서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시고 나서 또 다시 “둘째는 …”하고 이야기를 이어 가셨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맞지 않는 것 같죠. 그런데, 그 둘째가 무엇입니까? 바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것들보다 큰 계명들이 없다”가 아니라 “이것들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두 계명을 한 계명으로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가지 계명 사이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굳이 두 가지를 비교하자면 우선되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는 적어도 일반적인 경우에는 언제나 함께 가야 하는 것들입니다. 아니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나 자신처럼, 내가 나를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이 말씀을 우선은 두 가지 의미 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저 적당히가 아니라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인도를 준비하기 위해서 교재를 들여다 보다가 거기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서로 친하게만 되어도 쉽게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친한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관계입니다.” 저는 이 구절 앞에 멈춰서 곰곰히 이 내용을 생각하는 중에 “맞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고 또 열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작은 갈등과 차이도 감싸 안지 못하고 서로 힘들어 하고 다투며, 또 결국 관계가 깨어지게 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친하기는 하지만 진실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댄다고 해도 결국은 그래서 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진실로 사랑한다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훨씬 더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더 온전히 하나가 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성도들을 내 자신처럼 여긴다면, 우리가 우리 몸의 아픈 곳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애쓰듯이 조금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떻게든 함께 가려고 애쓸테니까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두번째 의미는 사람을 사랑하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의외로 굉장히 단순하고 구체적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십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요, 추우면 옷을 껴 입고, 아프면 쉬거나 약을 먹고, 치료를 받습니다. 졸리면 잠을 자고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필요한 그것을 공급해 주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필요를 최선을 다해서 공급해 주는 것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단순히 감정 차원의 일이 아니라 의지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야 더 좋겠지만 사랑의 감정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사랑을 향해 우리의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도움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을, 또 교회 안의 형제와 자매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십시오. 더 미우면 떡을 두 개 주십시오. 너무 너무 미우면 아얘 떡 방아간을 차려 안겨 주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그를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괜히 앞으로는 서로 남이 주는 떡을 안 받아 먹으려고 애쓰고 떡 주는 사람을 오해할까봐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밉다고 떡까지 빼앗지 마시고 떡 하나 더 주시기 바랍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너무 좋아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것은 100퍼센트 옳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태워 드리는 제사와 다른 모든 제물을 합한 것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 중에도 이런 지혜로운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서기관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정말 커다란 칭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전한 칭찬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도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험의 커트라인이 70점이라고 한다면 그 시험에서 69점으로 떨어지는 것은 굉장히 아깝게 떨어진 것입니다. 만약 60점으로 떨어졌다면 조금 아깝겠죠? 만약 점수가 40점이라면요? 그건 뭐 당연히 떨어져야 마땅한 점수죠.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가 점수에 따라서 떨어진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달라도, 69점이나 60점이나 40점이나 사실 떨어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시험이 절대로 떨어지면 안되는 시험, 정말 큰일 나는 시험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시험에서 69점으로 떨어진 것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칭찬해 주신 말씀은 칭찬은 칭찬이되 사실은 너무 너무 안타까운 칭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서기관이 통과해야 할 시험이 천국에 들어가는 시험인데, 그 서기관의 점수가 합격점수에 가깝기는 하지만 여전히 합격점수에는 못 미치는 그런 점수였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실은 그 서기관에게 “시험은 아주 잘 쳤어. 그런데 불합격이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지혜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던진 질문은 자기가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저 지혜로운 예수가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 주셨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그 대답의 평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에 대해 기쁘게 박수를 보내고 또 적극적으로 동의했지만 그리고 교만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마치 제자의 훌륭한 논문에 대해서 논평을 덧붙이는 교수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때로는 진리를 듣고 그 진리가 진리인 줄 알고, 또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아주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정도가 되는 것만도 분별력과 정직함이 필요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 되려면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야 합니다. 서기관에게는 바로 이 한 발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서기관은 옳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하나 하나의 율법 조항들은 순종했을지 몰라도 그 계명들 속에서 공명하고 있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라”는 진짜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멀지 않은 사람”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의 모든 것을 다해서 제대로 사랑하라는 계명,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계명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법이 하늘나라의 모든 법률을 떠받치는 두 기둥과 같은 것들이고, 그래서 그 법률을 무시한다면 더 이상 그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일에도 약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에는 더더욱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우리들에게도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이 두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알고 동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순종하기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자주 생각하는 아주 귀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 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 삶과 신앙에 정말 많은 유익을 주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기준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려면 우선 이 원리를 우리 마음과 생각에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커트라인이 70점으로 주어져 있는데, 70점을 맞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를 따지는 일이나 또 왜 하필이면 커트라인이 60점이 아니라 70점이냐고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계명에 대해서 이런 저런 평가를 내리는 일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계명입니다. 계명이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명령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으로 향해 가는 출발선상에 서게 됩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대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듣고 “예수님! 정말 그래요.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해야 해요. 그게 최고죠.”라고 대답하면 안됩니다. 그 대신 “주님, 그러면 어떻게 하죠? 내 속에는 그런 사랑이 없는데,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데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라고 탄식하며 물어야 합니다. 그 물음과 탄식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로 옮겨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기가 힘드십니까?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제대로 사랑하며,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일이 너무 버거우십니까? 혹시 그 중요한 계명을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이 여러분을 계속해서 좌절시켜 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의 목록에서 슬쩍 지워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사랑해 보려고 애썼지만 항상 자신에게 실망만 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랑에 실패했고, 사랑에 좌절했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계명 자체를 무시하려고 한 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제가 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할 능력을 구하고, 사랑할 은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절실함이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끈질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기도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고, 이제 그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 기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 특히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는 일의 전부가 될 수도 없고, 또 전부가 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그 사랑을 향해 가는 출발선상에 서 있는 제가 사랑의 첫 발자국을 뗄 수 있는 힘은 충분히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힘을 잃어버릴 때, 또다시 그 경주를 계속하게 해 주는 힘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모든 것에 우선해서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람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에는 그 계명에 순종하되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그렇게 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진실하고 간절하게 소원을 품고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사랑할 힘과 능력을 얻어서 사랑하라는, 그러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올해의 표어는 “벧엘로 돌아가자”입니다. 필요하다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일의 원점으로 되돌아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사랑하는 일에 얼마나 실패해 왔든, 얼마나 오랫동안 무관심해 왔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책을 받으며 살아왔든 처음 자리로 되돌아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일단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랑할 힘을 얻고 사랑할 은혜를 얻기 위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자리로 되돌아 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기도하자는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어찌보면 적절치 못한 대답과 결론같이 보이지만 저는 도대체 하나님께서 간절하고 진심어린 기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 말고는 도무지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주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랑을 시작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만약 사랑하게 해 달라는, 사랑할 힘과 은혜를 달라는 우리의 기도가 절실하고 절박한 기도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기쁘게 응답해 주셔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절대로 우리가 이리 저리 선택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 일 때문에 다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랑합시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또 서로를 뜨겁게 사랑합시다. 우선 그 일을 위해서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골방에서도 간구합시다. 올해는 그 일부터 시작해 봅시다. 그렇게 사랑 때문에 가난해 지고 사랑 앞에서 겸손해져 봅시다. 사랑 때문에 목 말라 하고 사랑 때문에 배고파져 봅시다. 그러면 주님은 그렇게 빈 곳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참 사랑을 향한 첫 발작국을 내딛게 해 주실 것입니다. 2014년도 올 한 해는 우리 모두가 오래 묶은 사랑이라는 숙제를 푸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 때문에 불편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지며 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거하게 되는 일이 시작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