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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13. 특새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산산수훈 6)



6.마0607to15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pdf


20140113D (#01).mp3.zip







설교본문 : 마태복음 6장 7-15절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통로로 생각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물론 예배와 세례와 그리고 성찬식 같은 예식들도 이런 것들 중에 포함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은혜의 통로는 기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 기도야 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우리의 말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말씀드릴 수 있는 수단이 되니까요. 물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기도에서 주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을 사용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들려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가 기도드릴 때, 어떤 언어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우리 말로는 한 말을 하고 또 한다는 뜻이지만 원래는 뜻 없는 말을 계속 지껄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종류의 말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미사여구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런 말들로 이루어진 기도를 전혀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이야기들을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주문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에서 인격성이 사라질 때,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에 불과해 지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 앞에서 여러분에 대한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정말 듣기 좋은 말들로 치장하는데 그 속에서 아무런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말을 우리가 기뻐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고 또 우리의 진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사용하는 이런 저런 많은 말로 하나님을 달래드리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진솔하게 마음을 다해서 대화를 나누듯이 그렇게 기도드리면 됩니다. 


게다가 우리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기도를 드려야 하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기도해야 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 기도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볼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적인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이방신을 섬기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모범이라는 것은 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는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오늘은 이 기도를 하나 하나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으니 큰 틀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절대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도 없고 우리에게 무관심한 어떤 신을 달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기도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기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니 떨거나 주저하거나 혹은 확신이 없이 기도 드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가 눈물과 함께 할 수도 있고, 또 부르짖는 절규와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기도는 항상 기대와 확신에 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 드릴 때 놓치면 안되는 특권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우선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내가 사는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또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가장 온전한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찾으실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될 때 최고로 복된 삶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우리 기도의 맨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후 갑자기 하루치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니 기도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청용열차를 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기도제목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지극히 현실적으로만 보이는 이 두 번째 기도제목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것을 구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이 기도를 진심을 다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단 정말 하루치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기도를 저절로 드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니 열외로 해 놓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기도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루치의 양식을 구하지 않습니다. 삼년치의 양식을 한꺼번에 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치의 양식만으로는 불안함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이 실은 불안함의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사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정말 자신에게는 하루 치의 양식만 허락되면 충분하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굉장한 믿음인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루 하루의 필요만 멈추지 않고 계속 공급된다면 전혀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그것 이상을 공급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매일 매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기도면 충분합니다. 또한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기도를 통해 거듭 거듭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요구하시면서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또 자신에 대한 겸손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의 기도는 어쩌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중에서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기도제목인지도 모릅니다. 저만해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를 드릴 때면 자꾸 이 부분에서는 웅얼웅얼 얼버무리게 될 때가 많고 그저 ‘하나님,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넘어 갈 때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구절은 마치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준 사람만이 하나님께 자신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참 이해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그저 그만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지 정말 우리가 땅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게 하시기 위해서 과장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것은 주님의 교훈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제목들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절대로 과장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 기도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이 기도가 이해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지은 죄와 여전히 짓고 있는 죄들은 굉장히 클 뿐만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용서 덕분에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은 그에 비하면, 아얘 없지는 않지만 아주 미미합니다. 만약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과연 그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이 될까요? 겸손한 마음이 되겠죠.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되겠죠. 또 자신이 어마어마한 용서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의 작은 죄를 용서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애통해 하는 마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더 많이 용서하려는 그런 마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내가 용서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 달라는 권리의 주장이 될 수 업습니다. 정작 자신은 용서에 인색하면서도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자의 가난하고 간절한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점점 더 큰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의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시험의 면제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죄악의 유혹이 없는 인생이란 없고, 불신앙의 시험이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죄의 유혹과 불신앙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없는 삶을 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이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드리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도 유혹과 시험과 싸워 이기려고 해야 하지만 승리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우리는 유혹과 시험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앞에 있을 때는 그 시험에 빠져 범죄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죄를 범하게 되면 그 때는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 때는 악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 악의 손아귀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죄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다가는 더 죄악의 손아귀에 강하게 붙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은 마지막 기도, 아니 고백으로 넘어가십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지 않다면, 그 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기도는 부도수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드릴 때마다 항상 이 고백 속에서, 이 고백 위에서 이것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아버지, 온 우주의 주인이시고, 또 주관자이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힘이 있고 위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또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일이나, 시험에 빠지지 않거나 악에게 계속 붙들려 있지 않기 위해서 그 위대한 우리 아버지의 은혜를 힘입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라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가장 겸손하고 낮은 자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가장 확신있고 또 능력있는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라 정직하고 진솔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기도하는 우리가 된다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 기도를 이 세상의 가장 강한 능력으로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심으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그런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