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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15. 특새 - 비판하지 말라(산상수훈 8)



8.마0701to06 - 비판하지 말라.pdf


20140115D (#1).mp3.zip





설교본문 : 마태복음 7장 1-6절



성경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십계명만 해도 하지 말라는 것이 참 많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열 개의 계명 중에서 여덟 개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 금지된 것들이 많은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금지된 것들을 향해 움직여 갈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러실 수 밖에 없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 중에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본성적이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는 것들이 있고, 이런 것들은 정말 정말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비판이 아닌가 합니다. 비판은 이성을 가진 인간의 생각이 자동적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건전한 상식과 도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비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결코 그릇된 것들이 바로 잡아지지 않을 것이며, 또 그런 점에서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일단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 말하는 비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 그런 후에 그것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비판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라고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옳고 그름을 가리고 평가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것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도덕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그것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니 하나님께서 이런 의미의 비판을 금지하실 리가 없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비판이 건전하고 정당한 비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아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를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아얘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비판’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입니다.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판’은 정확하게 말하면, ‘재판’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사람이 받아야 할 벌까지 결정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금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의 ‘비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조금 큰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저 사람은 큰 거짓말을 했으니 꽤 나쁜 일을 한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 까지는 괜찮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정말 몹쓸 인간이라느니, 저런 사람은 없어져야 한다느니, 응당 저 사람에게도 똑같은 아픔과 손해를 돌려 주어야 한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고, 때로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하는 것은 성경이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법정의 재판관으로 만들어서 그 사람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그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결정하고 나아가서 그 사람의 가치까지도 평가하는 일은 금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만이 법을 세우시고 집행하시며 또 그 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시지 인간들은 모두 그 법의 준수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서 법을 집행하고 또 법적인 판단을 하는 위정자들이나 법관들은 정해진 법에 따라 위법자들에게 응당한 형벌을 부과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의 비판하는 일을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은 나는 올바르다, 나는 의롭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일 수록 비판의 금지된 영역까지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산상수훈은 절대로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 백성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야기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법을 지키고 어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모습’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 의에 빠질 수 있고, 또 은혜를 율법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이렇게 예수 믿는데 너는 왜 이렇게 예수 믿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처럼 사랑하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믿음이 좋은데 너는 왜 믿음이 그렇게 없느냐?”라고 평가하고 그래서 그들을 자신보다 급이 낮은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신앙으로 인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나 혹은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무시하는 마음과 때로는 분노까지 생겨날 때,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재판관으로 만들고 예수님께서 넘지 말라고 금하신 선을 넘어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서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목사는 그런 점에서 이런 잘못을 저지를 아주 좋지 않은 입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체크하고 또 이끌어야 하니까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선 너머로 넘어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주님은 주님의 사역자들에게 “너희는 많이 선생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그러니까 작은 돌맹이는 보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군가의 재판관이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재판관이 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오늘 본문들의 말씀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서 재판관이 될 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저는 운전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앞에서 신호도 어기고, 차례도 어기고 위험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좋지 않은 말이 튀어 나옵니다. 물론 나쁜 감정이 섞인 말들이죠. 그럴 때는 제가 재판관이 됩니다. 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저라고 교통질서를 모두 지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력은 하지만 솔직히 알면서도 어길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보면서 정죄한 그 사람보다 더 심각하게 법을 어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그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들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그들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약 누군가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고서 그것을 고쳐 주려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뺀 후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형제가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끌을 스스로 뺄 수 없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스스로 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과 같은 종류의 들보가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다른 종류의 들보는 여전히 우리 눈 속에 있을 것이고, 사실 그 들보는 우리 눈 속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옳고 그름과 잘잘못은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때도 우리 눈 속에 우리도 모르는 들보가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그 때마다 우리 눈 속의 들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며, 또 우리의 믿음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부족할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팔복설교에서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 긍휼이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영적인 미덕은 특히 다른 이들의 죄를 바라보는 눈과 관련되어 있는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죄악을 볼 때, 물론 그가 악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 또한 자신의 악행 때문에 스스로도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속에 악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애통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도 불쌍히 여겨야 하며, 나 자신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죄인을 향한 하늘의 위로와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 역시 비판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죄가 아닌 참된 비판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와 같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는 거룩한 것을 주면 기분이 나빠지고, 돼지는 진주를 주면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준 사람들을 해칠 수 있습니다. 참된 비판은 좋은 것이지만 그 좋은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비판조차 아깝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비판도 주의해서 해야 한다고 정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판은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면서 해야 하며, 재판관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비록 나도 자격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의 위치에서 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애통한 마음으로,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 정말 귀한 것이라면 그 대상을 봐 가면서 해야 합니다. 전혀 귀한 말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귀한 이야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더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비판에 대한 가장 큰 원칙은 우리가 스스로 재판관이 되려고 하거나 혹은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바로잡아 주는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저마다 눈 속에 들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 들보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빼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비판자가 되시고 또 분별력 있는 비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비판 때문에 스스로 교만해 지는 일을 피하고 또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히 여기심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바르게 살고 바르게 믿으면서도 항상 머물러야 할 자리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 하늘 백성의 마음을 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