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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28.새벽예배 - 알지 못함이었더라(창세기 109)


창3117to32 -알지 못함이었더라(창1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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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31장 17-32절



삼촌 라반에게서 도망치기로 작정한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들로 나간 사이에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재산을 챙겨서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고향에는 형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 곳에도 위험의 요소가 남아 있었지만 상황도 그렇고 하나님의 명령도 그렇고 고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삶이 이런 진퇴양란의 어려움에 처해진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잘못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밧단 아람으로 도망쳐 온 것도 자기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밧단 아람에서조차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은 그가 삼촌 라반의 재산에 일부러 손해를 미쳤기 때문입니다. 물론 라반이 악하고 인색한 점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야곱의 욕심과 뒤틀린 복수심이 그 일을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다루어 가실 때, 죄 용서와 그 죄의 결과를 감당케 하시는 일을 따로 생각하시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면 그 죄가 만들어 낸 악한 열매들까지도 다 면제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만들어 낸 모든 쓴 열매들 까지 다 면제받도록 하지는 않으십니다. 물론 은혜롭게도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결과 전부를 우리가 감당하게 하시지는 않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 어느 정도는 항상 우리 몫의 어려움으로 남겨 놓으십니다. 악이 정말 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악은 그 모양이라도 취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죄를 조심하며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죄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문제이지만 실제적으로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여전히 악을 떠나지 못해서 점점 더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야곱의 모습은 우리에게 바로 그 귀중한 교훈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풍성해 지는 일을 막는 장애물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반 몰래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삼일이 흘렀습니다. 라반은 그제서야 야곱이 자기 몰래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화가난 라반은 사람들을 모아서 야곱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흘만에 길르앗 산이라는 곳에서 야곱을 따라 잡았습니다. 참 지독합니다. 그래도 두 딸의 남편인 사위인데, 그리고 조카인데, 그렇게 보면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 야곱과 야곱의 가족을 일칠 동안이나 말을 달려 쫓아올 수 있을까요? 게다가 실제로 일이 그렇게 된 데에는 자기의 책임도 굉장히 큰 데 말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언론에서 재벌가의 형제들 사이의 혈투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 일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겠지요. 한 사람이 물질에 집착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자기 혈육을 향해 분노를 품고 7일 동안이나 말을 달리는 라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내일 아침이면 라반은 야곱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날 밤 라반의 꿈에 한 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으셨던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굉장히 점잖게 들리는 말이지만 엄연한 하나님의 경고이고 협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재미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죠.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은 채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이 잡듯이 뒤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실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 경고는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야곱을 보호하시고 편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저는 이 말씀의 그림자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커다란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나마 무사한 것은 우리가 의롭고 하나님 보시기에 나무랄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잘잘못을 따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분명히 잘잘못을 분별해야 하고, 때로 그것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간됨과 또 이 세상을 지키는 길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럴 때도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협박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라반은 그 일로 인해서 야곱에게 손을 대지 않기로 하였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을 따라가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가당치 않은 위선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선함과 힘을 과시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 하였느냐?” 우리는 이미 19절에서 라헬이 라반의 가정신상인 드라빔을 훔쳤다는 사실을 읽어서 잘 알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야곱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누구나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고 또 그 결백을 주장할 때는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일이 나 자신하고만 관계된 일이라면 우리는 이런 확신을 이런 식으로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답답한 심정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야곱의 예를 볼 때, 그런 경우에도 반드시 생각해야할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지는 아무리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확신을 한다고 해도 그 확신 속에는 우리도 모르는 일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일이 그런 일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우리 마음과 기억 속에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부분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도 그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제 진심을 믿게 해 주려고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대화를 마치고 나서 정말 내 생각 속에 그런 생각이 정말 0.0001퍼센트도 없었나, 그런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었나하고 생각을 보니 예전의 생각과 마음이 완전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는 제가 없다고 아니라고 장담한 마음과 생각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할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니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하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으니까 말입니다. 


둘째로, 야곱의 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은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주변사람들, 특히 가족의 신앙도 잘 챙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분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확고하게 챙겨야 합니다. 왜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을까요? 왜 훔치기까지 해서 그 우상을 지니려고 했을까요? 저는 야곱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일방적인 편들어 주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어도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요. 야곱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었고 가장으로서 영적인 기준을 확고하게 세워 놓았다면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에 어느 부분이든 영적인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고, 그 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잘 챙길 때 내가 그 구멍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으며, 또 그런 우리들의 모습은 우리 가족, 그리고 성도들에게 좋은 모범과 자극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며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만큼의 바른 영적인 영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만큼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악은 버려야 하며, 신앙은 잘 챙겨야 합니다. 나 개인의 삶 속에서도 그렇고 가정 속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정말로 나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도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아름답고 복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유지하고 또 주변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가능한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또 직분자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지도력을 잘 사용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겸손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으면서도 삶과 주변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가고 위기들로만 채워져 가게 되었던 것은 그의 삶 속에 이런 모습들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야곱에게는 그런 것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힘쓸 때, 참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을 진실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셔서 참된 하나님의 하나님 되어주심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