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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14. 새벽예배 - 벧엘이라 불렀더라(창세기 117)


창3501to15 - 벧엘이라 불렀더라(창117).pdf


20140214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5장 1-15절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꼭 한 번 쯤은 하기 힘든 커다란 결단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 태도가 바뀌지 않고 또 결국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참된 신앙을 가지고 제대로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다른 것보다도 회개를 먼저 요구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이 되려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마음과 삶의 태도와 방식들을 떠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이렇게 회개를 하고 결단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라 이전에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처음 형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서 항상 함께 하면서 보호해 주고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주었던 언약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자신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에 야곱은 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며 특별히 편들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고 또 약속대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큰 재산과 함께 말입니다. 이제 야곱은 무엇을 해야할까요? 빨리 벧엘로 가야 합니다. 벧엘로 가서 단을 쌓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온전히 고백하며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천사를 만나 새로운 이름까지 얻고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벧엘로 가지 않습니다. 그냥 숙곳에 주저 앉아 버립니다. 자신의 각본대로 착착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자 또 다시 자기 자신만 의지해서 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놓치고 그냥 지나왔지만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얍복 나루터를 건넜던 33장 1절부터 시작해서 34장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단 한 차례도 성경에 등장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편들어 주셔서 야곱을 자기 고향 땅으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슬쩍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성경 장수로는 33장과 34장이 두 장 밖에 안되지만 세월로는 꽤 오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대개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밧단 아람을 떠났을 때의 나이를 12살 쯤으로 계산하는데요. 이 아들이 커서 칼을 들고 동생과 둘이서 성 하나를 멸절시킬 정도가 되었고, 디나가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적어도 십수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셨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계속 기다리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 시간 동안 야곱과 야곱 가족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다 지키셨습니다. 이제 누구 차례입니까? 야곱 차례입니다. 야곱이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고향에 돌아오자 마자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조금 편해지자 또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새로 얻은 땅에 자리를 잡고 적응하고 그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는 일에 십년이 넘는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디나의 일을 당하고 그것 때문에 가문이 멸절될 위기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서 살지 않는 시간들은 그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마치 33장 20절에서 34장 1절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과도 같은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도 기록할 것도, 기억할 것도 없는 가볍고 무의미한 시간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신앙으로 인한 별다른 은혜도 주어지지 않고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디나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져서 더 이상 손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오랜 침묵을 깨고 야곱의 삶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야곱은 이것을 차일 피일 미루어 오고 있었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것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빨리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기를 원하셨고 야곱은 여전히 옛 습관에 빠져서 전전긍긍하면서도 이상하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셔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달리 기댈 구석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두 손, 두 발 다 들기로 했습니다. 가족들을 완전히 준비시킨 후에 벧엘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이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부려서 하나님을 지치고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고집이 영원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면 빨리 하나님 손에 붙잡히는 것이 상책입니다. 괜히 고집 부려봤자 피곤해지고 힘들어 지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를 더할 수 밖에 없고 말입니다. 


벧엘은 온 가족들과 함께 완전히 무장해제의 상태에서 숙곳을 떠나 벧엘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정말 단 한 사람도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변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사로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무사히 벧엘로 도착했고 거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10절부터 15절의 이야기는 그 벧엘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면서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반복해 주시고는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것은 얍복 나루에서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신 것입니다. 반복에는 다짐의 의미가 있고 또 공식적인 인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름과 언약에 걸맞는 삶의 모습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14절과 15절을 보시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예전에 처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올라가신 그 곳에 돌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전제물과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다시 한 번 ‘벧엘’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같은 행동이라고 같은 항상 같은 뜻만 지니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고 항상 같은 뜻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말이라도 하는 상황이나 혹은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 다릅니다. 제가 20년 전에 저희 어머니를 부르는 ‘엄마’라는 말은 지금 제가 저희 어머니를 부르는 ‘엄마’라는 말과 그 깊이와 무게가 전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아주 오래 전에도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행동을 했고 또 그 곳의 이름을 똑같이 붙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의 행동들은 무게와 깊이,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그는 정말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로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있고, 정말 그곳을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 자신이 신뢰하는 언약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행동들과 똑같은 말들을 반복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행동들의 무게가 달라지고 그 말들의 깊이와 의미가 달라지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의 행동과 말들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은 행동이라도 똑같은 말들이라도 점점 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미로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올해 표어를 함께 읽어볼까요? “회복의 땅 우리의 벧엘로 돌아가자” 그렇습니다. 이것이 올해 우리의 영적인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고향인 벧엘로 돌아가지는 말은 그저 제 자리로, 혹은 예전에 있었던 그 자리로 돌아가자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벧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벧엘을 우리는 또 다시 무게도 깊이도 다르게 벧엘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로 되돌아 가면 거기서 우리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매주 매주가 여러분의 벧엘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깊어지고 더 깊어지고, 새로워지고 더 새로워지고… 나의 하나님을 더욱 더 진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그런 은혜를 반복해서 누리시기 바랍니다.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고 또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런 반복적인 돌이킴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온전한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 되어주심을 더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되시고 벧엘이 다시 벧엘되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