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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21.새벽예배 - 요셉이 꿈을 꾸고(창세기 121)


창3705to11 - 요셉이 꿈을 꾸고(창121).pdf


20140221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7장 5-11절



어제 살펴 보았듯이 요셉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철 없는 행동으로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야곱의 빗나가고 형평이 깨진 사랑도 일조를 했습니다. 야곱은 항상 그런 요셉의 편을 들어주었고 다른 자녀들은 변변치 않은 옷을 걸치고 들에서 양을 칠 때, 요셉에게는 색동옷을 입혀서 그들의 감시자가 되게 했으니까요. 2절을 보면 요셉이 특별히 감시했던 것은 빌하와 실바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야곱은 요셉만 편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에게서 태어난 자녀들과 그렇지 않은 자녀들 사이도 차별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녀들 사이, 그리고 자신과 자녀들 사이의 관계는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셉은 정말 철 없는 행동을 두 번이나 더 반복합니다. 자신이 꾼 꿈을 형제들과 야곱에게 그대로 이야기 했는데, 요셉이 그 꿈을 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 꿈의 내용이 듣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가관이라고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형제들과 야곱에게 가감 없이 들려줍니다. 첫번째 꿈은 곡식단들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이야기인 즉 자신이 거두어 들여서 묶은 곡식단에 형제들이 거두어 들인 곡식단들이 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들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나무라고 요셉을 더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또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두번째 꿈은 더 직접적인 꿈이었습니다. 열 하나의 별들과 해와 달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꿈도 그대로 형제들과 야곱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혹시 요셉은 첫번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고서 그렇게 전달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꿈은 그 뜻을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확한 꿈이었습니다. 해와 달, 열 한 개의 별이 절하는 한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형제들을 물론이고 아버지인 야곱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너에게 절한다는 소리냐고 따끔하게 요셉을 나무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 꿈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놓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등장하는 창세기 37장부터 본격적인 이스라엘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을 꿈 이야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꿈은 특히 구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꿈은 굉장히 중요한 계시와 예언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더불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언이나 꿈, 음성이나 환상…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 많은 경우 이것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만큼 신기하고 놀랍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경우 대개는 그런 것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고, 혹은 계시와 환상을 주시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 있을 일을 알려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말이 맞나 안 맞나 봐라하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과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줍니다. 여기에 이런 것들의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거나 경험할 때마다 그것 자체에 놀라기 보다는 “아.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들과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하나님께 더 큰 신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선물들을 이렇게 사용할 때 우리는 부작용 없이 그것들을 통해서 더 큰 믿음에 이를 수 있고 또 그런 것들의 유익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꿈을 혼자서 간직했다면 형들은 요셉을 덜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이야기를 모든 가족들에게 했고, 그래서 가족들 사이의 미움의 골은 더욱 더 깊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나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잘못 사용되어지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들이나 혹은 은사들을 대하고 사용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복도 좋은 것이고, 은사도 좋은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는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거나 혹은 그래서 질투의 이유가 될 때, 그것이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이 받은 특별한 복이나 은사에 대해서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기는 정말 정말 힘이 듭니다. 좋은 것이고 특별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복도 은사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없다는 사실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드러내고 자랑한다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상처가 되고 그게 관계를 망가뜨리는 이유가 됩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정말 우리가 복이라고 말하는 그 복을 꽤 많이 받으셨고 또 그렇게 가진 것으로 남을 섬기고 돕는 일들도 참 잘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이 자신이 받은 복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자꾸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그 분이 받은 복이 부러워서가 아닙니다. 그런 행동 자체가 실제로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교만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나누기를 좋아하는 은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으니 복도 은사도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이나 혹은 은사들도 우리 한 사람하고만 상관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안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배려입니다. 혹시 나는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주는 신중함과 그런 행동을 풀어내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한 배려와 지혜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한 것들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낼지도 모를 부작용들을 최소화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 하는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것들을 이렇게 사용하는 방법을 한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흔쾌히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고 불쾌해 하는 것은 다 비슷비슷하니까요. 꼭 좋은 것을 전달하거나 베풀 때는 이 생각을 먼저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선하고 좋은 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선하고 좋은 것이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지혜롭게, 절제하면서 사용하셔서 모두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복된 사용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