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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25. 새벽예배 - 야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창세기 122)



창3712to36 -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창122).pdf


20140225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7장 12-36절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방향과 목적을 정하는 분 또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그렇게 정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섭리해 가시는 분 또한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그것을 거스르는 선택과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동들 까지도 다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흐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시고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일컬어서 ‘악을 선케 만드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 놓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인간들의 악하고 더러운 선택과 행동들이 결국에는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는 도구가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혹은 성경의 이야기들과 같은 현실 속의 이야기들을 볼 때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악한 일들을 시키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역사 속의 모든 일을 섭리해 가신다는 말은 절대로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람이 악한 선택과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것을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역사와 그 속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해 가신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악한 행동과 선택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저질러진 악행은 고스란히 사람들의 악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우리 각자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2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이 구절은 결국 야곱이 시작하고 요셉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형제 간의 갈등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형들이 아우를 죽이라고 하다가 결국 상인들에게 팔고 그 상인들은 그 아우를 애굽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이 일을 덮고자 형들은 염소의 피를 아우의 옷에 묻혀서 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아무래도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 같다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말을 믿고 오랫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한 가족, 한 형제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얼마나 악하고 슬픈 일입니까? 그렇지만 이것이 단지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기록에 불과할까요? 이 구절을 바라보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우선 성경은 그렇게 요셉이 팔려간 곳이 다른 곳이 아니라 애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미 요셉의 꿈 이야기를 통해 요셉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의 중심이 요셉과 함께 애굽으로 움직여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애굽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나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곳은 커다란 흉년 때문에 멸절의 위기에 처해진 이스라엘을 양육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내실 곳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기 14장에서 말씀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8절은 그런 흐름 속에서 창세기 14장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집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큰 나라로 양육하신 후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 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이제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요셉을 판 것이 하나님이 원래 계획해 놓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 일을 통해서 어쨋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가고 있기는 하지만 요셉을 파는 악한 일을 한 것은 형제들이 그들의 생각과 의지로 선택한 악한 일입니다. 또 이 일이 일어나게 했던 야곱의 요셉을 향한 편애와 요셉의 철 없는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12절로 돌아가 보면 야곱은 요셉을 또다시 형제들이 양을 치고 있는 곳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또다시 야곱에게 형제들에 대한 스파이 역할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미 익숙해진 자신의 역할대로 형제들을 살피고 상황을 보고하려고 형제들을 찾아나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야곱과 요셉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또 하나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마치 위태롭게 흔들리는 돌탑 꼭데기에 또 하나의 돌을 올려놓는 것같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그렇게 온 가족이 하나씩 하나씩 아무 생각없이 쌓아올린 돌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동생을 보고서 갑작스레 그 동생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유다가 그 일을 막기는 했지만 동생을 팔아 넘겼고 또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야 말로 가정이 풍비박산 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사람 하나 온전히 선하게 행동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무너진 탑을 쌓는데 모두가 다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무너진 탑의 돌들을 다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에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는 고백을 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니 그렇게 모든 것을 결국 선으로 돌리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또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정말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정신이 아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기만 하고 감사하기만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과 함께 우리가 잊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최선을 다해서 고쳐 나가며, 그렇게 드러난 우리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까지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한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또 다시 그러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만들어 좋지 않은 결과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숙한 성도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은혜와는 별도로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은혜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선택을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처리해 나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을 이루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밝게 빛나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항상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잘못이 있고 연약함이 있어도 내 삶은  선하신 하나님이 은혜로 섭리해 가신다는 것을 믿고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그 은혜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고 그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내 속의 악함과 약함을 최선을 다해서 줄여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은혜 가운데서 더욱 더 거룩해져 가는 우리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영광스럽게 빛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