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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26. 새벽예배 - 꿈 꾸는 자가 오는 도다(창세기 123)


창3718to36 -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창123).pdf


20140226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7장 18-36절



누군가 자기 인생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 꿈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더 싫어하고 또 그 사람의 꿈 자체를 비난하거나 비웃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꿈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 꿈을 가진 사람 자신이나 그 사람의 삶의 모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가 쉽습니다. 꿈은 거창한데 아무런 애씀과 노력이 없을 때, 꿈은 고상한데 그 사람의 삶과 성품이 그 꿈과는 전혀 다르게 보여질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꿈 때문에 존중을 받고 사랑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비웃음 거리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꿈이 어떤 꿈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 꿈을 꾸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신앙은 어찌보면 하나의 꿈입니다.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으로 붙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붙듭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붙들고 성령님을 붙듭니다. 믿음은 하늘나라를 붙들고 진리를 붙듭니다. 믿음은 이 세상이 복음으로 회복되는 꿈을 꾸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는 것을 꿈꿉니다. 이 어느 것 하나 눈에 보이는 것 없지만 믿음은 이런 것들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것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 자체가 하나의 소망이 되고 또 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도 더 확실하다는 특징은 있지만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꿈은 같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아듣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이런 꿈이 무조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꿈 자체는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때로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만약 그 꿈을 꾸고 또 그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우리들이 진지하고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결코 우리들의 꿈 이야기를 그저 무시하고 비웃기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에게로 다가오는 요셉을 보면서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 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것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면서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뭔가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던 꿈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꿈 꾸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이미 요셉을 형제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이름을 좋은 뜻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비아냥 거리며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는 만약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면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겠다고 마음에 악감을 품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이런 악한 음모를 꾸미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요셉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꿈이 요셉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 방아쇠 역할을 했던 것은 그 꿈을 꾸었던 요셉의 됨됨이와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면서 안하무인으로 자라났습니다. 17살이나 되어서도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철부지같은 행동만 계속했습니다. 요셉이 이런 상태였다면 차라리 요셉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굳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그러지 않아도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형제들에게, 그것도 두 번씩이나 했습니다. 사실 이것 또한 요셉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전혀 형제들이 자기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평가를 헤아리지 못했고 그래서 형제들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저 “나 이런 대단한 꿈을 꿨다!”라고 자랑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도 꿈을 꾸는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꿈, 복음이 이 세상에 편만해 지는 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전하는 그릇이 되는 꿈을 꿉니다. 이런 꿈들은 우리가 만들어 낸 꿈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우리에게 꾸게 하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런 꿈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하고 가장 아름다운 꿈을 담을 그릇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꿈을 이야기 하며 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 질 것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요셉을 통해 지금의 한국 교회와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또 지금 우리들을 바라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꿈을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은 우리를 ‘꿈 꾸는 자들’이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우리의 꿈 자체를 비웃고, 핍박하면서 이래도 너희들의 꿈이 이루어지는가 한 번 보자는 식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한국 사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우리의 꿈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꿈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영적인 반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이유가 요셉을 닮은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꿈은 큽니다. 꿈은 너무 훌륭합니다. 그런데, 거룩함이 없습니다. 빛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 꿈을 담을 묵직함이 없고 또 그 꿈을 향한 헌신이 없습니다. 그냥 꿈만 있고 그 꿈만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꿈만 자랑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 성도들을 향해 꿈 꾸는 자라고 부르며, 우리들의 꿈을 비웃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비웃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형제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꿈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그 꿈 때문에 우리를 비웃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다 먼 데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 우리의 이웃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로 인해서 우리가 꾸는 꿈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게 하고 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꿈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은 우리의 꿈이 아니라 그 꿈을 담고 있는 우리의 삶과 성품이라는 그릇을 먼저 보고 그 그릇에 비추어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을 평가합니다. 그들의 눈에 그릇이 귀하게 여겨질 때, 그 안에 담겨있다고 이야기 되어지는 꿈을 가치있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지만 그 꿈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삶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항상 내가 하나님의 꿈을 담은 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꿈이 담긴 그릇답게 자신을 성령님의 역사와 은혜 가운데서 다듬어 가시고 빚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귀기울여 듣는 그런 이야기가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을 변화시키는 그들을 위한 꿈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오늘을 사는 참된 요셉이 되어 아름답고 향기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꿈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일에 사용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