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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3.04. 새벽예배 -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세기 126)


창3812to30 -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1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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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38장 1-30절(12-30절)



다말은 유다에게서 셋째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시아버지 말대로 집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굉장히 부당한 요구였습니다. 이미 자기 집안으로 시집 온 며느리는 어떻게든 그 집안에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다말을 아내로 맞아들였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아마 유다는 굉장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나 남은 아들이라도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 밖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말도 유다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리고 그런 비극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없었지만 유다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이어서 그 말에 따라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유다는 막내인 셀라를 다말에게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아버지로부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가 다말의 고향인 딤나에 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다말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창녀로 위장하고 딤나 곁길 에나임 문에 앉아서 유다를 기다립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말이 이렇게 했다는 것은 다말이 알고 있는 평상시의 유다의 행실이 어떠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말이 생각하기에 유다는 그렇게 하기만 하면 유혹에 넘어가는 그런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일은 작전대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에나임 문 곁에 앉아있는 여인을 발견한 유다는 다가가서 그 여인과 흥정을 벌입니다. 여인은 값을 요구합니다. 가진 것이 없었던 유다는 염소 한 마리를 주겠지만 지금은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담보로 유다의 인장 목거리와 지팡이를 요구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정말 중요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몰랐던 유다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인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말은 그 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나중에 담보물을 찾으러 보냈지만 아얘 그 성읍에는 창녀가 산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더 남부끄러운 일이 벌어지게 될까 두려워 자신의 인장과 지팡이를 찾는 일을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세 달쯤 지난 후에 유다의 속을 뒤집어 놓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그것은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 이야기를 듣자 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참 우습습니다. 유다는 얼마 전에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이 숨기고 싶을 정도의 남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엄밀하게 결과만 다를 뿐이지 다말이 저질렀다고 보고되는 일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똑같은 행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며느리를 불살라 죽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우리가 지금은 제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만약 유다가 다말이 저지른 일이 당장 불살라 죽일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자기가 저지른 일 또한 심각한 잘못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유다는 자신의 잘못은 그저 살짝 덮어놓았으면서도 똑같은 며느리의 잘못은 당장 불살라 죽여야 할 죄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말은 집에서 끌려나가면서 간직하고 있던 인장과 지팡이를 내놓으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우선 제 시아버지께 가서 이것을 보이며 제가 임신한 것은 이 물건의 주인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시아버지께 물어봐 주십시오.” 유다는 그 물건을 보고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 때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잠시 저지른 잘못이 이렇게 상상하지 못할 결과로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유다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속인 며느리가 너무 너무 괘씸했고 그래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순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다는 그 순간 다말의 행동 자체보다 오히려 다말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다말을 그렇게 만든 것이 자기 자신임을 인정합니다. 유다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다말에게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입니다. 물론 하나 남은 아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지만, 그 선택 때문에 남의 집 귀한 딸을 평생 시집도 못 가는 죄인 아닌 죄인을 만들어 놓았으며 그것은 다말에게는 가장 잔인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다말이 유다에게 행한 일이 더 나쁜 일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그 일 자체보다 그 일의 원인이 되었던 일을 더 크게 보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말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또 나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누군가의 사이에서 그 사람이 잘못된 일을 행하면 그 사람만을 비난하게 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다의 행동은 굉장히 정직하고 용기 있으며 또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또 한 동안은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모르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잘못이 잘못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그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인정하며 최선을 다해서 책임을 지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만약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이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생겨났다면 그것이 나의 행동은 아닐지라도 나의 잘못을 더 큰 잘못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 일도 생겨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사실 이 이야기 속에서 잘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며느리를 속여서 집으로 돌려 보낸 유다, 시아버지를 더러운 거짓말로 속여서 임신한 다말, 또 다말을 돈으로 사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유다… 그 누구도 잘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악한 일의 고리를 끊은 것은 유다였습니다. 유다가 그 일의 근본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했을 때, 그 일은 더 이상의 악하고 잔인한 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는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상황 속에서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함으로써 악이 악을 만들어 내고, 죄가 더 큰 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 키재기를 하는 도토리들입니다. 물론 그 차이가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살아가려고 힘써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의 의로움에는 차이가 나 봤자 도토리들 사이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고 또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으니까요.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이 보잘 것 없음을 잊지 않게 될 것이고 그래서 정직하게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불의함을 인정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없으니까요. 


악을 이기는 것은 선입니다. 그리고 그 선의 출발은 나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고 항상 겸손하게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죄와 잘못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도하고 힘써도 모든 죄악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만큼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나의 불의함과 잘못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정직함만큼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함은 방패입니다. 내 삶 속에,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악이 더 넓게 퍼져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작은 방패입니다. 그리고 정직함이 최선입니다. 항상 실수하고 또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의가 부족한 우리에게는 정직함보다 더 나은 미덕은 없습니다. 이 정직함을 거부할 때, 우리는 더더욱 악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될 것이고 또 이 세상에 나도 모르게 더 많은 죄들을 범할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정직한 사람들이 되어서 그 정직함으로 자기를 지키고 이 세상을 지키는 용기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