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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3.07. 새벽예배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창세기 129)


창3911to23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창12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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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39장 11-23절




사탄이 죄로 우리를 유혹할 때, 사탄은 크게 두 가지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첫째, 사탄은 우리가 죄를 선택하면 우리가 행복해지고 만족해 지며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사람들이 죄에 쉽게 넘어가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사탄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를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가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하며, 고통과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우리를 협박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이 두 가지 무기를 다 가지고 요셉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은 자신의 주인인 보디발과 나아가서 자신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바로 그것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로 부터 모함을 받게 됩니다. 원래 악인들이란 그렇습니다. 자신이 악을 도모하고 있고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그 일에 끌어들이려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을 괴롭힙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고통과 손해를 입힙니다. 그리고는 뒤에서 그것을 즐거워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의 유혹을 뿌리치자 앙심을 품습니다. 그리고는 우선 집안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는데 자기가 소리를 지르니 이렇게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사악한 여인인지 일단 이렇게 공론화시켜서 나중에 남편이 슬쩍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왔을 때는 남편에게 일부러 요셉이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 우리에게 데리고 온 히브리 종”이라고 말면서 또 다시 똑같은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말도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일의 책임을 요셉이 아닌 보디발에게 돌려 그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공격을 받고 비난을 받으면 날카로워집니다. 그러면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보디발은 자기 아내의 작전에 넘어갔습니다. 이성을 잃고 감정적이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자초지종을 따져 볼 것도 없이 요셉을 왕의 죄수들, 그러니까 심각하지 않은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앞에서 잠시 사람들이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현실적인 오해와 손해에 대한 협박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요셉의 경우에는 이것이 그저 협박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정말 최선을 다해서 유혹을 물리치고 죄를 이겨냈더니 그에게 돌아온 것은 칭찬과 영광 대신에 비난과 고난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혹은 집단이 부패해 있을 때는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노력과 싸움은 오해와 손해, 그리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연결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오해를 풀어주시고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다 막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사실 그 기대는 이루어질 때보다 깨질 때가 더 많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일이 이렇다면 누가 나서서 죄와 싸우려고 하겠으며, 또 도대체 하나님은 이럴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그 일 하나만 놓고 본다면,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죄와 싸우고 악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기만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죄와 싸우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올바르게 행동하면 언제나 예외 없이 아무 어려움 없이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선을 추구하고 또 선을 행하는 일에는 손해와 오해에 대한 두려움만 있지, 결코 현실적인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행하는 일 뒤에는 항상 그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또 많은 경우 그것이 현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일이 하나님께 가치 있는 일이 되며 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증며해 보이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현실적인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하나님을 그만큼 중요하고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일이 그 일 바로 초래하는 당장의 부정적인 결과가 아닙니다. 20절 뒷쪽부터 2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그 다음 이야기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요셉이 간수장의 사랑을 받고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감옥에서도 감옥 전체의 일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하나님을 따르고 선을 행하려는 결정을 내리고 움직일 때, 그 순간 우리를 도와주시고 건져주시기도 하지만, 그런 선택 때문에 우리가 힘겨워 지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그런 상황 속으로 찾아오셔서 간섭하시고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실제로 경험해 보면 뒤쪽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 선택 때문에 손해도 있고, 고통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현실적이기만한 사람들은 이미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겠지만 실은 그것이 진짜 은혜 중의 진짜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부어주시는 은혜 덕분에 그런 상황 안에서도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가 있으며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확신이 그를 당당하고 기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가 누리게 될 하늘 영광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게 그의 금과 같은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누릴 수 있다면 그 곳은 언제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는 기적의 장소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리심 가운데 거하는 하늘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죄와 싸우는 일이 가져올 손해와 어려움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 서서 죄와 싸우고 유혹을 물리치려는 사람들을 당장 그 선택이 초래할 어려움과 손해로 부터 건져 주시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분명히 함께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훨씬 더 먼 일이지만 그런 결정 하나 하나를 우리에게 하늘의 빛나는 영광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함께 해 주시는 은혜와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시며 죄와 싸우고 유혹을 이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