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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02. 새벽예배 - 나는 양의 문이니(사순절 5-3)


13. 요1007to10 - 나는 양의 문이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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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0장 07-10절



 

예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설명해 주는 많은 비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양과 목자의 비유는 읽고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해야 하며 또 얼마나 단단한 신뢰 위에 세워진 관계인지를 기억나게 해 줍니다. 제가 어떤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쓰신 분은 미국의 성경학자인데 도대체 양과 목자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관계인지가 궁금해서 실제로 중동으로 가서 목동들과 1년을 산 분이십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너무 감동도 되고 충격도 된 그런 내용이 있어서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어느 정도의 앎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책은 목자가 양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목동이 빛 한 점 없는 밤에 양의 우리로 갑니다. 양들은 목자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반갑게 매애~ 매애~ 울어댑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사람의 귀로 그런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양들의 울음소리만 듣고 그게 검둥이의 울음소리인지, 얼룩이의 울음소리인지, 흰둥이의 울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동지역의 목자들은 그 울음소리만으로 양의 이름을 정확하게 맞춘답니다. 그러니 그 울음소리로 그 양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식은 죽 먹기겠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목자가 양을 안다고 할 때,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이야기입니다.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그 분의 양인 우리들을 아는 것은 벌건 대낮에 이렇게 쳐다 보면서 “저건 다 내 양이다”라고 말하는 정도의 앎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심은 우리가 칠흙같은 어둠 속에 있을 때에도 우리의 신음소리를 구분하실 수 있을 정도의 앎을 말합니다. 그 울음 소리만 듣고도 우리의 상태를 파악하실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앎을 말합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은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어느 정도의 보살핌을 의미할까요? 중동지역의 목축은 유목입니다. 계절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여 다니면서 풀을 찾죠. 그러다 보니 때로는 들판에서 양떼들과 함께 밤을 지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밤에 이 목자들이 양떼를 어떻게 돌보는 줄 아십니까? 며칠이고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으니 잠을 자야 하기는 하는데, 그래서 이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한쪽 눈만 감고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 것인가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런 방법을 생각해 냈고, 연습했고, 그래서 진짜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자기 양을 돌보는 것도 이런 식으로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 분의 양이신 우리를 지키시는 것은 과연 어떠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일에 게으르실까요? 그 어떤 순간이라도 그 분의 돌보심을 멈추는 순간이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돌보심을 그런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우리의 목자라고 말씀하신 두 분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고 또 두 분을 모독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런 목자라면 목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삯꾼이 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중동지역의 양과 목자는 단순히 짐승과 그 짐승을 돌보는 사람의 관계가 아닙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목자의 지켜주고 돌봐주며 인도해 주는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어리디 어린 자녀와 그 자녀를,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돌보고 지켜주는 아버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 모르는 구석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돌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이 사실을 잊지 마시고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설마 이런 것까지 돌보실까 하신다면 그 때는 그래 이런 것까지 돌보신다고 생각하시면 바로 그 생각이 정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느낌이 아니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 또 하나의 그림을 덧붙여 줍니다. 7절인데요.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면 꼴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목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양의 문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실지도 모르지만,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양들이 아침에 들판에 나갈 때도 그렇지만 낮동안 들판에서 놀다가 밤이 되어 목자가 부르면 양의 우리로 들어오는데, 그 때 목자는 우리의 입구에 누워서 양의 문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 목자를 통과하거나 넘어서 우리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목자는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자신을 통과해서 우리로 들어가는 양들을 확인한다고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양의 문이란 바로 그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들을 위한 목자의 또 다른 역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목자만이 양의 문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양들은 목자를 통해서 우리에 드나 들어야 안전할 수 있고 또 꼴을 얻어 먹을 수 있습니다.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과한다면 적어도 그 곳은 그 양이 들어가야 할 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양을 훔치고 헤치는 도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말씀이 그러한 목자의 역할을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양들의 분별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자의 역할이 아니라 양들의 분별력입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를 알아보고 그 목자가 누워있는 우리로 들어갔고 그것이 그들이 안전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고 또 풍성한 꼴을 공급받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신앙은 절대로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목자되신 예수님께 별로 관심도 없는데, 그 분을 따르려는 의지도 없고, 내가 지금 따르는 분이 나의 목자되신 예수님인지 강도인지 분별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것이나 따라다니는데 예수님께서 나의 참 목자되어주심을 경험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 든든한 안전과 평안, 그리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은 영적으로도 그렇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자기가 참 목자라고 주장하는 헤아릴 수 없는 주장이 있습니다. 돈, 명예, 쾌락, 건강, 학벌, 성공… 심지어는 노후준비까지 나서서 나만 따라오면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텔레비젼만 틀고 인터넷에만 들어가면 정말 수도 없는 설교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자신의 이야기가 진리라고 외치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주장들이 다 저마다 자신이 참 목자라고 외치는 그런 상황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의 참 목자가 누구인지를 분별해야 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래서 다른 이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듯이, 누가 그리고 어떤 주장이 나의 목자인지 또 어떤 것은 그저 듣기 좋은 강도의 꼬득임인지 분별해야 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별력은 어디서 올까요? 우선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해답을 생각해 본다면, 양들은 이미 예수님과 친밀하고 온전한 관계, 자기 목자의 음성과 다른 사람들의 음성을 듣자 마자 구분할 정도의 친밀하고 잘 아는 관계 속에 있었고 그 관계가 바로 그들의 분별력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음성만 듣고 그 음성에만 반응하고 순종해 왔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과 그렇지 않은 다른 음성을 고민 없이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음성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따르려면, 그래서 그 분이 누워 계신 그 곳을 통해서 안전하고 풍성한 꼴이 넘치는 양의 우리로 들어가려면 평상시에 주님의 말씀 자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꼭 필요한 순간에 자신이 목자라고 주장하는 그 수많은 주장들 중에서 무엇이 우리 주님의 음성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제가 알고 있는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것만 잘 기억하고 지키셔도 영적으로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첫째, 나의 욕심을 편 들어 주는 음성은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의 욕심을 편들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꼭 필요한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남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구약 성경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그 음성에만 따를 때, 그저 덤으로 붙여지는 것이 바로 구약 성경의 복이지 그 복만 따로 주어진다는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복 자체가 양의 문으로 드나들어야 얻을 수 있는 풍성한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거도 없이 욕심을 이루라고 우리를 부추기는 메세지는 그것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해 진다고 하더라도 목자의 음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 너무 쉬운 길을 가르쳐 주는 메세지는 도둑의 음성이기가 쉽습니다. 지금 정도면 된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려주는 주장, 그러면서도 복 받을 것을 약속하는 주장들은 가짜이기가 쉽습니다. 진짜 목자라면 양이 가고자 하는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자꾸 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고 하며 때로는 막대기로 때리더라도 낭떠러지가 아니라 안전한 길로 가도록 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들으실 때 너무 편하기만 하다면 그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시면 안됩니다. 한 두 번이야, 가끔씩이야 그럴 수 있지만 계속 그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 음성은 목자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 목자의 성품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요. 그것은 여러분의 정직함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들려지는 이야기들을 들으실 때, 그 모든 말씀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최대한 여러분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을 배제한 상태에서 마음을 열고 들어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야기가 정말로 가리키는 곳이 낭떠러지인지 아니면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인지가 분별됩니다. 


예수 믿는 게 굉장히 복잡하죠? 그리고 예민하죠?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정말 정말 예민한 종교입니다.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기독교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는 것도 아니고, 능력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복을 받는 것도 아니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안전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다 우리의 영혼이 안전한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풍성한 꼴을 주시려고 하시지만 그 꼴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 드나들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따라해 보실까요?  “어떻게 믿어도 예수만 믿으면 되지” “어떻게 믿어도 예수만 믿으면 되지” 절대로 이런 이야기와 생각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강도의 음성이고 우리로 하여금 목자가 아니라 강도를 따라가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 주님께서 주시고 싶어하시는 그 하늘의 양식으로 배부르기를 소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만 순종해야 하며,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런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완전히 그런 분별력을 갖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분별력을 갖추려고 애써야 합니다. 더 좋은 것, 내가 딱 원하는 그런 것을 주겠다고 보장하는 주장이 있어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단호함도 필요하구요.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꼴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그 풍성한 꼴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생활 할 때만 약속된 것입니다. 양처럼 단순하게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시고 그렇게 분별된 음성만 따라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전함과 풍성함을 놓치지 않으시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