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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10. 새벽예배 - 그의 정죄됨을 보고(사순절 6-4)


17. 마2703to10 - 그의 정죄됨을 보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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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27장 03-10절



어느 계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한 겨울의 하루 중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은 한 밤 중이 아니라 동이 트기 직전입니다. 그 시간은 세상을 비춰주던 태양 뿐만 아니라 그 태양이 선물했던 따스한 온기도 가장 차갑게 식어버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그 시간은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의 시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보다도 인류 역사에서 어둡고 추운 시간은 없었습니다. 태양마저도 빛을 잃고 온 세상은 칠흙처럼 어두워 졌고 인간의 모든 악함은 바깥 세상으로 나와서 마치 이 세상이 자기 손아귀에 있는 양 설쳐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후부터 십자가로 향해가는 순간들은 역사상 가장 어둡고 차가운 새벽을 향해 가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그리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들은 어둡고 차갑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그 때 뭐에 씌웠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 지도 모르고, 평소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을 저질러 놓고 나중에 제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하는 이야기이죠. 우리는 무엇에든지 씌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엇에 씌우게 되면 그 어떤 일이든지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게 모든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넘긴 가롯 유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가 돈이 탐이 나서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너무 쉽게 가망 없는 죄인으로 취급하지만, 실제로 가롯 유다는 우리 식으로 하면 그야 말로 뭐에 씌워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유월절 만찬 중의 예수님의 호소와 경고를 모두 무시하고서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일은 저질러 졌습니다. 구원 받아야 할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는 무시무시한 범죄는 저질러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악들이 저질러진 이후가 다 그렇지만 유다는 그렇게 이미 물이 엎질러 진 후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완전히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댓가로 받은 은 삼십을 다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죄한 생명을 팔아넘긴 댓가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아주 기본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의 욕망과 감정에 따라서, 그것을 앞에 놓고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스스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서 움직이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타락한 본능이며 욕심입니다. 가룟 유다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돈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제 나에게 쓸모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팔아 돈이라도 챙기자. 지금까지 만사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댓가라도 챙겨야 하겠다.’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생각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욕심을 앞세우면 생각은 그 때부터 그 욕심을 합리화 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생각은 생각의 역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의 지지까지 받아낸 우리들은 이제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장애도 가지지 않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원래 우리의 이성이란 가치와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해서 거기 따라 욕심을 통제하고 또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앞세우게 되면 생각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게 됩니다. 그 때부터 생각은 욕심의 시녀노릇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당연하게 죄짓게 만드는 데로 이끌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상시에 정직한 생각으로 자신의 욕망을 평가하고 다스리는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생각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상황에서는 가롯 유다처럼 속수무책으로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그 때는 이미 때가 늦어 버립니다. 


3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자기가 한 일을 뉘우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다음에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대신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가룟 유다가 돈을 돌려 줄 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하였는데, 유다는 그들의 말처럼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모두 스스로가 지려고 한 나머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물론 책임을 진다고 해서 그 죄악이 만들어 낸 모든 결과를 다 제 자리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비교적 가벼워 보이는 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최선을 다해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책임질 수 없는 그런 죄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죄가 바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어떻게든 어느 정도라도 제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가 없고, 그 댓가를 그에게 지불할 수가 없으니까요. 또 한 가지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죄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께 직접 저지르는 죄입니다. 그런 죄는 절대로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게 어떤 죄이든 죄가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래서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 때부터는 나 자신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특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죄를 내 힘으로 책임져 보려고 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사태만 더 악화될 뿐입니다. 그 때는 아무리 염치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유다는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하지 못했고 그저 자기 자신이 다 당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유다의 진짜 실수는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셨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가 커다란 죄나 계속 반복되는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까지도 꺼리게 되는데,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 용서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한편 유다의 자살에 일조를 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유다가 그렇게 던져 놓고 간 금전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마땅 않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말 속에서도 죄 때문에 눈이 먼 사람들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게 됩니다. 원래 그 돈은 성전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성전고에 들여놓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애초에 그 돈은 왜 성전창고에서 나왔을까요? 어디다 쓰려고요? 그 돈은 예수를 불법으로 잡기 위해서, 제자에게 스승을 파는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서 성전창고에서 꺼내온 것입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그렇게 불의한 일에 사용하려고 성전창고에서 돈을 꺼낼 때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이제 그 돈을 다시 되돌려 놓는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생각하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죄가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면 그 때부터는 생각하는 일에 일관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더 악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훨씬 덜 악한 일에 대해서는 과하리만치 예민해 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돈으로 밭을 사서 좋은 일에 쓰기로 했습니다. 그 밭을 묻힐 곳 없는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사용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의 기준으로는 굉장히 선한 일입니다. 그들은 망자의 장례식을 제대로 잘 치러주는 것을 굉장히 선한 일로 생각했고 나그네 대접하는 일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은 이 두 가지 선행을 모두 생각한 아주 선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사용한 돈은 그들이 죄 없는 예수님을 잡아 넣기 위해 미끼로 사용되었던 돈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가장 악한 일을 행한 대가로 지불했던 돈을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가장 선한 일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또 한 번의 이중성을 보인 것입니다. 


죄는 인간에게 해결할 수 없는 숙제입니다. 죄는 삶을 망가뜨리며 존재를 망쳐 버립니다. 죄를 깨달았기에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고 죄가 죄 인줄 모르기 때문에 모순 투성이의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주셨습니다. 항상 죄의 유혹을 받고 또 죄를 짓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그렇게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 눈에서 십자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무서운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또 용서해 주시는 은혜, 씻어 주시는 은혜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죄가 아무리 어둡고 무거울 지라도, 칠흙 같을 지라도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셔서 그 십자가가 여러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되어주는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