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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4.13. 주일오전 - 닭이 두 번 울기 전에(마가복음 71)


막1453to72 - 닭이 두 번 울기 전에(마가71).pdf


20140413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53-72절



욕망으로 가득 찬 불법적인 교회세습, 어마 어마한 교회 건축과 관련된 비리들, 목회자들의 학력위조와 교회 재정 유용… 이것이 요즘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요즘처럼 이 땅의 교회가 이렇게 어둡기만 했었던 적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앞장 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단순히 구제를 하거나 선교를 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회 안의 공적인 영역에서도 그랬습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의 초기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어떤 고을들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서 원님들이 부임하기를 꺼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면서 절대로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고을들에는 가 봤자 생기는 것이 없으니 거기 부임하는 것을 그렇게 꺼렸던 것입니다. 일제시대로 넘어와서는 교회는 이 나라의 사상적인 기둥이었고, 독립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했던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하니 그 당시 기독교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던 교회가 어느 때부터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그런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움직여 가게 되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지금의 부끄럽고 어두운 모습으로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모습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이 되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커다란 문제이고 위기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커다란 시험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이것도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시험이란 성도가 스스로의 신앙을 드러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 믿는 일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전도도 열심히 했는데, 점점 더 전도하는 일에 소극적이 됩니다. 식당에 가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일도 예전처럼 자연스럽지가 않고, 내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누가 예수 믿느냐고 물어보면 슬쩍 얼버무리기도 합니다. 나는 이전과 똑같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꾸 그렇게 됩니다. 자기 엄마가 엄마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엄마가 아니라 이모라고 했다는 어떤 꼬마의 이야기처럼 꼭 우리가 예수 믿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고 움츠러 들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반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 또한 몸된 교회의 지체이고 일원이기 때문에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해서 뻔뻔한 태도를 보이거나 합리화 하려고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직하게 인정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 믿는 일이나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부정적이 되고 소극적이 되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내버려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요즘 교계에는 ‘가나안 성도’라고 불리는 분들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제 후배들 중에도 몇 명이 있는데요.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가나안은 ‘안 나가’를 거꾸로 읽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성도라는 말은 물어보면 예수를 믿기는 믿는다고 대답은 하는데 교회에는 안 나가고 좀처럼 나가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이런 상태가 된 일차적인 책임은 분명히 교회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성도가 된 이유를 들어보면 대부분 교회가 그들을 실망시키고 커다란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이 자기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교회가 어둡다고 여겨지는 때일수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을 수록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잘 지켜내야 합니다. 예수님과 자기 신앙에 대한 올바른 마음과 태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것이 영적인 침체로 이어지거나 심각한 경우 신앙 자체에 대한 회의나 포기로 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체 모양을 살펴보면 이야기의 처음부분과 마지막 부분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재판을 받는 이야기가 끼어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끝에 저주까지 해 가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점점 더 짙어져 가는 어둠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스스로도 영적인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여차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예수님께서 다시 풀려나실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정리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대제사장의 관저까지 들어왔을 것입니다. 이제껏 예수님께서는 많은 위기들을 그렇게 넘기셨으니까요.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면서 아마도 베드로는 그러한 자신의 희망이 점점 더 현실과 가까워져 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증언들이 하나도 서로 일지하지 않았고, 그것은 곧 그들의 증언이 모두 효력이 없는 증언이라는 뜻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희망에 찬물을 끼얹어 더 이상 가망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찬송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받아 피해가시지 않고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상황은 정말 겉잡을 수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에, 그를 결박하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았고, 눈을 가리고는 주먹으로 예수님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맞춰 보라고, 선지자 노릇을 한 번 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니라고 말하며 아랫 뜰에서 윗 뜰로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은 거기까지 따라와서는 더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 패라고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는 또 부인했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 패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만약 자신이 예수님과 한 패라면 자신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면서 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닭이 두 번째 웁니다. 베드로는 오늘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베드로는 그렇게 처참하게 실패해 버린 자신의 악하고 약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통곡을 하게 됩니다. 


크기와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들도 얼마든지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영적인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시험이란 예측할 수 없는 때에 예측할 수 없는 크기와 강도로 우리를 찾아오니까요. 그래서 이런 시험에 미리 대비해 놓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미리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똑같은 시험을 당하더라도 실패하는 정도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정반대가 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이 두 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영적인 실패와 승리에 대한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진리로 여러분을 무장시키시기 바랍니다. 


그 날 베드로가 실패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해서 하신 말씀에 마음과 생각을 쏟지 않고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과 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 날 대제사장의 집안에는 온통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적대감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증거를 꾸며 대고 있었고, 상황은 점점 예수님께 불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셨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흔들림 없이 말씀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집중해야 했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온통 예수님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에만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불리해 지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본능을 따라서 반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결국에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가 분명하고 견고한 사람들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더라도 금새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고 온전하려면 우리의 신앙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 속에서도 그 사람 자신을 믿느냐 혹은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믿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지고 또 그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에 대한 얼마나 다양한 주장들과 다양한 태도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대개는 적대적이고 왜곡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들 또한 우리 신앙에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부조리해 보이기만 하는 세상, 예수를 믿는데도 끊이지 않는 개인적인 어려움과 고통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앙을 연단하려고 이런 것들을 허락하시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 신앙을 뒤흔들려는 도전들로 다가오게 됩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도 분명한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진리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믿음이 아니라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반응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영적인 실패와 침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재판을 예수님의 패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굉장히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재판을 받았고,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이제 끝입니다. 완전히 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 재판에 진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마지막을 맞이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제자들에게 자신은 십자가로 향해 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원들에게 붙들려 고난을 당하실 것도,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실 것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끝이 아니고 패배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영광스러운 부활을 향해 가는 하나 하나의 길목이었고, 결국 온 우주의 왕이 되시는 과정에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가장 처참하고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는 능력이 되었으며, 그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왕좌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 죽음의 열매였고 그 십자가가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자리였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건 아마 다 아시고 또 다 인정하실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도 구원도 불가능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믿느냐 하는 것에 그 사람의 믿음의 능력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기 생명을 걸고 종교를 개혁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진리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자 또 기초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루터는 어떻게 해서 끊임없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 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단순히 의협심에 불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강인한 인물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십자가 뒤에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겉으로는 죽음이지만 그 뒤에는 그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한 하나님의 승리가 숨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십자가는 가장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 뒤에는 그 어리석음으로 모든 지혜를 정복하신 하나님이 가장 큰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숨어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승리, 그리고 지혜를 보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깨달음이나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에 적용했습니다. 그 뒤에 승리하신 하나님이 숨어 계신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받는 핍박을 승리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사형선고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패배가 아닌 승리로 여겨졌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 중에서 스텐리 죤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88세를 사셨는데요. 이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무려 67년을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분은 86세 때에도 일본으로 복음전도 여행을 떠날 정도로 건강하신 분이셨는데, 애석하게도 그 여행을 떠나기 전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사고 능력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게 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분은 그 때 자신이 병상에 누워서 했던 생각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이 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이대로 살다가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십자가도 패배처럼 보이는 승리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당시에는 실패로 보였지만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나도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죽어도 괜찮아. 이대로 반신불수의 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들 어떠랴!’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이라는 가장 두려운 실패를 가장 위대한 성공으로 만드셨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었다. 우리는 패배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된다. 깨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기피하면 안된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선으로 악을, 사랑으로 미움을, 세상을 정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최고 최선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앗아가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가 만약 거기서 고통과 실패, 그리고 죽음만을 본다면, 우리는 그 십자가를 닮은 모든 것들을 피하려고 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또한 겁먹은 베드로, 그래서 실패한 베드로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어려움 또한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위대한 것은 그 십자가가 단지 우리의 위한 죄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정말로 위대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게 해 주는 눈을 주고, 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의 죄나 욕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바라보게 되면 그런 것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 속의 패배와 고통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승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베드로는 십자가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보는 눈을 뜨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패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의 스승이 되어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사실 그날 밤,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가장 불안해하고, 또 두려워하며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들 서슬 퍼렇게 예수님을 해치려고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처럼 차분하고, 예수님처럼 당당하며 흔들림이 없었던 분이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떠들어 대는 거짓증인들을 그저 담담한 침묵으로 대하셨고, 대제사장의 함정도 피해가지 않고 대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렇게 바위처럼 든든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예수님 자신의 말씀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 질문은 예수님이 누군신가 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내가 영광 중에 다시 올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자신이 하실 일과 운명이며, 또 하나님과의 관계도 확실하게 아셨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붙들려 와서 억울한 재판을 당하는 중에도, 창조주이신 분이 일개 피조물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셨고 그 확신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바위처럼 계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눈을 그렇게 의식하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지 못해서 속상해 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볼 때 정말 정말 속상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은 믿음이 주는 자유와 능력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때부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말의 뜻은 그 분이 우리를 보시는 눈만이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분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지게 됩니다. 점점 더 그것만이 중요해 지는 그런 쪽으로 변화되어져 갑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그저 보이는 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나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그 분이 나를 피 값으로 사셨기에 나는 그 분에게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사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셨다는 사실, 내 영혼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에 그런 복된 삶으로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 그 분은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셨다는 사실 등. 신앙 안에서 나에게 일어난 수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환경과 조건에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연습이 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흔들고, 또 내 믿음을 흔들려는 환경과 사람들의 도전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거듭 거듭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과 감정이 아니라 그 사실이 전해 주는 메세지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고 우리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께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으셨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같은 견고함을 지닐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은, 환경은, 그리고 우리의 경험들은 항상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하지 절대로 세워주고 견고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능력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알아야 하며 또 그 비결을 사용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그들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고정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이고 여러분의 귀에는 예수님의 말씀만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또, 십자가가 예수님의 승리였고 그 분의 보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믿음으로 붙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 인생의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이제 그것이 패배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참된 승리와 영광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누구인지, 그 분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확신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 잊으시더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셔서 자녀 삼으셨다는 그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실을 잊지는 마십시오. 이 세 가지를 꼭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꼭 붙들고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둘러싼 그 시험과 두려움의 어둠 속에서 승리의 새벽, 영광의 새벽이 동터 오게 해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한 곡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찬송가 357장인데요. 우리 한 번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불러 보겠습니다. 


(1)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2)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 하면서 겁 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3)

끝까지 이긴 자에게 흰 옷을 입히고 또 영생 복을 주시니 참 기쁜 일일세 

이 어둔 세상 지나서 저 천성 가도록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이제 세 가지 제목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1. 나의 눈길을 주님께만 고정하고 나의 귀를 주님의 말씀에만 기울이게 하소서. 
  2. 승리의 십자가를 통해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실패처럼 보이는 일들을 다시 보게 하소서.
  3. 내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자존심을 버리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이기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