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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16. 새벽예배 -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사순절 7-3)


20. 막1533to37 -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pdf


20140416D (#1).mp3.zip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5장 33-3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간은 오전 아홉시 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또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이제 우리 시간으로 정오가 되었고 다른 날 같았으면 해가 중천에 떠 올라 가장 따갑게 내리 쬐었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이상하게도 그 시간에 갑자기 온 땅에 어둠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흐른 후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께서는 당시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방언인 아람어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지금까지 버려두셨나이까?”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을 그냥 버려두신 것이 됩니다. 사실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을 리가 없으며 그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 고통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신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진짜로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는 진짜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저 숭고한 희생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제물이 되어 돌아 가셔야 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실 수 밖에 없으셨고 저주와 형벌을 쏟아부으실 수 밖에 없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또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고통의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생생한 현실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 밝은 얼굴을 보여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해같이 빛나는 얼굴로 예수님을 대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 아들에게 저주하시고 진노를 퍼부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온 세상을 가득 채운 어둠은 바로 그래서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어둠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때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너무 너무 기뻐하시며 하늘을 찬란히 빛나는 별빛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밤이었지만 결코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기뻐하는 아들을 저주하고 버리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얼굴을 돌리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기쁨이 별빛이 되어 온 세상을 비춰 주었듯이 그 날은 하나님의 슬픔이 어둠이 되어 온 세상을 덮었던 것입니다. 태양마저도 빛을 잃어버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 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고통과 슬픔은 절규가 되고 어둠이 되어 그렇게 온 세상을 덮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프고 슬픈 일이 일어난 것은 모두가 다 죄인인 우리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자녀 삼으시기를 원하셨는데,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버림을 받고 아버지는 아들을 버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만 생각하곤 합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진짜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짜 고통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는 고통, 절대로 버림받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며, 사랑만 받아야 하는 분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영혼의 고통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렇게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저주하고 그 아들을 향해 진노하셔야만 하는 아버지의 슬픔, 그 날 대낮을 어둠게 만들었던 어둠처럼 까맣게 타들어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얘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 날 그 옆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처럼 우리들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고통에는 무지합니다. 그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는 그만큼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당하셨다는 것을 상상해 보는 정도에서 그쳐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알 수도 없고 또 느낄 수도 없는 그 고통과 슬픔을 알고 느껴 보려고 끙끙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버려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슬픔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알고 또 느껴보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은혜와 사랑의 무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서 말할 때, 그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대신 생명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턱없이 부족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그 죽음 속에는 단순히 생명을 내어주는 일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가능케 했던 예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되갚으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와 사랑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깊고 풍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전혀 갚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제 그 사랑과 은혜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계속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러니까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답게 귀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저주하여 버리시는 슬픔을 감당하셨습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합니까? 이런 사랑과 은혜를 증거로 보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결단을 내리기에는 불안하십니까? 다시 십자가에서 사랑과 은혜의 증거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은혜에 기대어 살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고 여러분 또한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항상 십자가의 위에서의 주님의 외침을 가슴에 품고 그 사랑과 은혜 가운데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