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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22. 새벽예배 -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창세기 130)



창4001to08 -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창1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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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40장 01-08절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굉장히 막연한 기대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며 복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과 기대가 그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십니다. 항상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며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은혜들을 기대하며 떠올리는 그림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들을 주시는 실제 그림이 전혀 다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들을 생각할 때, 대개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는 상황 자체를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직함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고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승승장구의 은혜입니다. 곧바로 상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 때문에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그 때 거기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거기서 인자를 더하시고 감옥의 간수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으며, 그래서 그 감옥의 제반업무를 맡아 주관하는 총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도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거듭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실까요? 첫째는 그런 상황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훈련을 시키시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런 상황 속에서라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발만 더 앞으로 내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때, 그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어 주고 끌어 올려주어야 그 도움이 얼마나 귀하고 절실한 것인지 압니다. 그 도움을 준 사람의 선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평평한 길을 편안하게 걸어갈 때는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어 봤자 자신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잘 느낄 수가 없고, 그래서 그 도움을 준 사람의 선함에 대해서 제대로 경험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를 알려 주시고 그 공치사나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도와주시는지, 그리고 그 도움이 얼마나 충분하고 능력있는 도움인지를 깨닫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짜로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가 오히려 어려움에 빠지거나 오해를 받게 될 때, 왜 내가 주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는데 이런 어려움을 나에게 주시나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만, 계속해서 그런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됩니다. 빨리 그런 생각을 추스리고 다시 그런 상황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며 그 안에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놓여있는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오히려 상황이 변하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일을 통해 금과 같은 믿음을 얻게 됩니다. 


요셉이 그렇게 옥에 갇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감옥의 총무가 되어서 옥에 관련된 모든 업무들을 주관하고 있을 때, 그 감옥에는 아주 귀한 두 사람이 죄수가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술을 맡은 관리였고 또 한 사람은 왕의 빵을 맡은 관리였습니다. 술과 빵을 맡는 일이 뭐가 귀한 일인가 하시겠지만, 고대세계에서는 왕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맡는 사람들은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직위도 굉장히 높았습니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런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지 간수는 이 두 사람을 돌보는 일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돌봐주었을까요? 


성경에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요셉이 이 두 사람을 형식적으로 돌보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근심의 빛까지 살필 정도로 그들을 마음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연유를 묻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할 정도로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까지 성실하고 세심하게 그들을 돌봐 주었던 환경은 평안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 또한 죄수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주인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고 하다가 그 주인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된 정말 억울한 피해자 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상황에서도 중죄인들의 얼굴표정까지 살피고 그들의 상담역이 되어 줄 정도로 신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평상시에 잘 하던 일도 하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자기 상황이 힘들어 지면 남에게 대한 관심도 사그라 들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런 배려와 여유를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운 미덕을 발휘하고 또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유지하려면 우리 스스로 마음이나 생각을 고쳐 먹는 일로는 부족합니다. 그게 일시적인 위안은 될지 몰라도 그러는 중에도 상황이 바뀌지 않고, 또 언제 바뀔지도 확실치 않다면 금새 지치고 자신에 대해서는 더 예민해지거나 주변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지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 자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입니다. 요셉은 비록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자신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이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었으며, 또 자기 자신이나 상황에 집착하지 않게 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열악한 감옥 속에서도 다른 이들의 얼굴에 서린 근심까지도 읽어내고 그 일을 도와주고 싶어할 만큼의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대개는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당연한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도는 그런 상식을 넘어설 수 있는 비결을 이미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비결은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또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평안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사랑할 수 있는 여유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평안과 사랑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상황에 빠지고 갇혀서 지낼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나를 변함없는 은혜로 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믿음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 사랑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