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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4.24. 주일오전 -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빌레몬서 1)



빌레몬서1.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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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레몬서 1장 1-7절




 성경은 한 권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한 권이 아니라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전집과도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 성경을 ‘한 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성경이 도무지 수천년 동안 수 십 명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어졌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과 사상면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연구할수록 성경 자체에 대해서 감탄할 수 밖에 없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가끔씩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궁금증을 가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 중에는 우리가 성경 66권 중 한 권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이 성경에 들어갔을까?”하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 책이 무슨 이유로 성경에 속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빌레몬서라는 책도 그런 책들 중의 하나입니다.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이 책이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성도에게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라는 종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여 줄 것과, 그를 다시 자신에게 보내어 자신의 일을 돕게 해 달라는 개인적인 부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성경에 들어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감나무골 김 초시가 자기에게 도망쳐 온 대추나무골 이 진사의 종을 그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너에게서 도망쳐 온 개똥이란 놈이 내게 왔는데, 내가 겪어 보니 참 괜챦은 아이인 것 같다. 내 잘 설득해서 너에게 다시 보내니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고, 다시 나에게 보내서 내 일을 돕게 해 달라.”라는 개인적인 부탁을 편지로 써서 보냈는데, 나중에 이 편지가 나중에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꼭 알아야 하는 논어맹자와 같은 책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훈에는 직접적인 교훈이 있고, 어떤 이야기와 상황을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통해서 사랑해야한다는 직접적인 교훈을 얻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사랑을 행하는 사람의 삶 전체나 혹은 하나의 일화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서 간접적이지만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분명히 바울 개인이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빌레몬서는 예수 믿는 개인과 교회에 관해, 그리고 믿음의 능력에 관해 정말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갈 때, 그 복음은 사람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또 그 변화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교회는 그래서 어떤 곳이 되어야 하며, 또 될 수 밖에 없는지 하는 것에 대한 진리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안에 담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그야 말로 인격과 교회 안에 체화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당당하게 신약성경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물론 이 말은 완전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으면서도 그 믿음이 도대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이 되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믿어서 변화가 일어나면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변화는 마치 믿음 생활에 따르는 부록과 같아서 일어나도 좋고 일어나지 않아도 괜챦은 일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사람치고 새롭게 변하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생각과 가치관, 성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면적인 부분에 세세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에서는 변화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일이 더 놀라운 일이 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빌레몬서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보물찾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빌레몬서 속에는 이 보물들이 조각 조각 나눠져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조각들을 찾아서 하나로 모으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보석들이 제 빛을 발하게 될테니까요. 오늘은 복음 안에서 변화된 바울의 모습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피고, 다음 주에는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살펴본 후, 마지막에는 시간이 되는 대로 모든 내용을 살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의 모습과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다룬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마지막에 가서 굉장한 충격을 받고 또 감동과 아픔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 자막으로 올라가는 영화에 대한 설명 중에 그 영화가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화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가 우리에게 주는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우리에게 강하고 실제적인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이 책이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들이 살아낸 진짜 삶의 단편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하고 정직하게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가운데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부족하고 나는 어느 부분에서 내면적으로 더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발견하고 도전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변화를 향한 결단과 진전이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사람이 대범함과 세심함을 겸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대개는 둘 중의 한 가지를 포기하는 길을 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는 것은 대범함이 아니라 세심함입니다. 세심함을 희생해서라도 대범함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 편이 대접받고 편하게 살기에 유리하고 상처를 훨씬 덜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런 어려운 선택을 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며, 또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대부분의 바울의 모습은 대범함과 섬세함을 고루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사실 세심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하고 정확하며 굉장히 차가운 사람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돌을 맞아 죽는 스데반을 보면서도 정말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고 나서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균형잡힌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진리와 하나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하며, 존중하는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권위가 많이 약화된 오늘날이지만, 그런 요즈음에도 자신이 영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거의 맹목적이 되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을 향해서는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 사람에 관해서는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는 거의 신과도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단들이나 대형교회의 목회자에 대한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이유도 다 그것 때문입니다. 바르던 그렇지 않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그렇게 크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살던 시대의 세계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 시대는 사람을 신이라고 해도 곧이 곧대로 믿고, 조금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 그 사람을 신으로 추앙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을 전혀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던 바울이 성도 개개인에게 미쳤던 영향력이 어떠했겠습니까? 바울이 종종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정도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영적이고 신앙적인 영역에 있어서 바울의 영향력은 그야 말로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자기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영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는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그런 권위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런 권위를 진리를 지키고 믿음의 자녀들을 권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는 자신이 영적인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항상 겸손하고 따스하며 세심했습니다. 우리는 빌레몬서 여기 저기서 바울의 이런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바울은 자신이 빌레몬에게 하려는 부탁이 개인적인 부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주님 안에서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또 빌레몬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으며, 바울에게서 신앙의 양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일은 빌레몬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바울은 요구라고 말하지 않고 간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것은 권위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그 분으로 인한 자신과 빌레몬 사이의 사랑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윗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 크고 거절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구요. 일반적으로 강력한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인간 대 인간, 그것도 부탁이 있기 때문에 더 낮은 위치로 내려간 사람으로써 간절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네 승락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아무리 당연하고 선한 일이라도 그것을 당연한 듯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선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럴만한 위치에 있으니까 명령을 내려서 그렇게 하도록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런 태도를 취했던 것은 빌레몬을 향한 따뜻한 배려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설명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그 중에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설명인데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니까 명령하거나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럴만한 권위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이 빌레몬에게도 선한 일이 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일이 원칙적으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빌레몬이 자발적으로 행한 선한 일이 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기 때문에, 또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인격과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옳기 때문에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롭고 옳아도 사랑 없이 행해진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의가 참된 정의가 되려면, 그 정의는 반드시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무례한 것이고 분노에서 나온, 결국 상처와 갈등만 남기는 폭력이 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한다는 생각 아래 그 일과 관련된 사람이나 혹은 그 선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선행 조차도 자기 기준으로, 또 만족을 위해서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 분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남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청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굉장히 뻔뻔하고 당당한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도움을 받는 것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는 것 같이 보이는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분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마음이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때로 그런 분들을 만나면 기분이 굉장히 나쁩니다. 화가 나기도 합니다. 도대체 도움 받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도와주기가 싫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 분들에게 남에게 몇 푼의 도움의 받는 것은 정말로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정반대로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당당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 같습니다. 소심한 사람이 소심함을 숨기려고 대범한 척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에게 ‘당신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보다 낮아져라, 겸손해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요? 그 사람이 겸손하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돕는 사람은 그저 도와주면 됩니다. 그 분들의 태도 때문에 도움을 주고 안주고를 내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선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남을 향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받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 일과 관련된 상대방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지금 바로 그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18절과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입힌 손해가 있다면 그것을 다 자신이 갚아주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편지를 대필로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특별히 친필로 기록하면서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에 있다면 내가 갚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친필로 썼다는 것은 인격을 걸고 하는 약속이며 맹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 일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의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책임을 지는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말로만 영적힌 형제로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말로만 자녀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믿음 안에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인 사람으로써 가족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말로는 누군가를 추천할 수 있습니다. 잘 말해 주어서 다른 사람이 호감을 갖게 해 줄 수는 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저지른 일까지 책임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헤픈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별로 연관이 없는 듯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열매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가장 큰 증거와 열매가 바로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열매를 갈망하고 애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그리고 바울을 닮은 빌레몬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도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덕분에 살고 있으며, 그 사랑의 은혜가 없다면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의 마땅한 모습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에는 질서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누구나 그 질서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 주어지는 일종의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 권력은 어떤 사람의 어느 부분, 혹은 전체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권력은 가정이나 회사, 교회나 심지어는 개인간의 관계 안에서도 생겨납니다. 사람이 관계를 맺는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권력 자체를 없앨 수도, 또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권력과 영향력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인도하고 지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를 위해서 그 일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도력 자체는, 그리고 그 지도력을 위한 권력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본다면 그 권력은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권력을 사용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올바른 일에는 담대하고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세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름답고 균형있는 인격체로 변해가야 합니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올바른 것을 위해서는 대범한 사람이 되어가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심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그런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는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킬 충분한 능력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로 영광스러운 복이고 선물이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믿는 세월이 오래된 것을 자랑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변화된 성품과 삶으로 그 세월의 참된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고 기도하며 묵상하며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빚어져 가는 은혜 가운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