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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29. 새벽예배 -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창세기 134)


창4114to24 -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창13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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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41장 14-24절




사람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어떤 문제들은 사람들의 수준에서 해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 그리고 진짜 어려운 문제들은 그 의미와 이유를 이해할 수조차 없고 또 그래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의 역사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이나 혹은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을 살펴보면 정말 사람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 못할 일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알아내지 못할 것들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요즘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상식으로 여겨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판단한 것이고 절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일들 뿐만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여전해 해답과 해결방법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요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는 사람이 꾼 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요셉의 꿈, 두 관리의 꿈, 그리고 바로의 꿈. 이런 꿈들은 사람들이 꿉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흔히 우리가 ‘개꿈’이라고 부르는 꿈도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꿈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습게도 그 꿈을 꾸는 당사자 조차 그 꿈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꾼 꿈의 의미조차 모르면서도 그 꿈에 스스로 사로 잡혀서 심각한 번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과연 이런 인간이 인생과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꾼 꿈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바로는 애굽의 난다 긴다하는 석학들과 술사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꿈 이야기를 듣고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아마 이들은 이전에는 바로의 꿈을 아주 쉽게 해석해 주곤 했을 것입니다. 그 해석을 바탕으로 조언도 해 주었을 것이고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 꿈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한 꿈들도 아니었고 두 꿈은 너무도 닮아 있었는데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그들이 그 꿈을 해석하는 것을 막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은 알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이유도 똑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과연 우리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 덕분일까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알도록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모르는 것은 그 반대이고 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기로 작정하신다면 그것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일로 요셉은 바로 앞으로 불려 왔습니다. 바로는 이미 술맡은 관리로 부터 요셉에 대한 소개를 들었던 터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이 이 대답 속에서 이야기 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요셉이 이전에 두 관리가 꿈 때문에 고민할 때 했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해석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대답이 바로에게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대화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지가 보이십니까? 바로는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강대국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는 꿈 하나를 꾸고는 그 꿈에 사로 잡혀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감옥에 있던 무지랭이 히브리 종까지 불러 올립니다. 그리고는 그 꿈에 대한 해석을 부탁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어마 어마한 왕 앞에 선 요셉, 정말 배경이라고는 전혀 없는 히브리 종은 너무나 여유롭고 당당합니다. 그런 왕 앞에서도 전혀 당황하거나 기가 죽지 않고 겸손하지만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이 주시는 지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가지지 않고로 당당해지기도 하고 또 비굴해 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당당함이나 비굴함은 그것을 지켜 보는 사람에게 전혀 아름답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런 것으로 당당해지거나 혹은 비굴해 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겸손하면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적어도 보이는 것의 유무에 따라서 기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서 교만해 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 없이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없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위로할 수가 없고 또 참된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바른 시각과 해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답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그 답을 들려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것, 그리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바로 그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과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으며, 또 하나님의 뜻과 계시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성경의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분별력과 지혜를 지니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지닌 사람처럼 자신의 앞 길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리에 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성경이 주는 지혜와 분별력을 붙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 그리고 우리를 기죽게 하려고 시험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주님 주시는 당당함과 확신을 잊지 않는 겸손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