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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4.05.25. 전교인 기도회 -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1)

       


14. 계0307to13 -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1).pdf


20140525SE (#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7-13절




오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살펴 보겠는데요. 주님은 다른 교회들에게도 그러셨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주님은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편지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눈을 감고 이렇게 나타나신 주님을 그려 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이 모습만 그려보아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며, 괜히 든든해 지지 않습니까?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십니다. 그 판단이 흠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십니다. 성도들을 향해서 진실한 마음, 그 마음만 품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지금 다윗의 열쇠 곧, 하늘나라의 영적인 복의 집행권을 가지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그 문을 열어주시려고 그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감격하게 됩니다. 흥분하게 됩니다. 너무 너무 기쁘면 원하는 것은 다 줄테니 말해보라고 하기도 아지요. 그런데 자녀를 보고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자녀인 우리들로 인해 흥분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욥기를 보면 거기에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 서자 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은 단지 땅 이 곳 저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다고 보고하는데, 하나님은 대뜸 욥에 관한 자랑을 늘어놓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탄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누가 물어봤나?’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욥 때문에 흥분해 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자녀 때문에, 그 분의 백성 때문에 이렇게 유치해 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저는 이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더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시며 자랑하시는지 하나님은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 아니십니까? 저는 이 세상이 이런 신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런 모습으로 찾아 가셨습니다. 모든 축복을 마구 쏟아부어 주시려고 다윗의 열쇠를 들고 흥분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실 것을 기대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시며 자랑스러워 하시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정말 신나지 않겠습니까? 신앙을 제대로 지키기가 힘들고 또 고단해 질 때마다 그래도 바른 길을 가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실 우리 영원한 아버지의 기쁨과 칭찬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시는 그 분의 얼굴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열쇠로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들이 바로 이 복된 말씀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할렐루야!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너의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문을 닫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 문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모자라서 그 문을 영원히 열어놓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빌라델비아 교회의 무엇을 보고 이런 복을 약속해 주셨을까요? 


8절을 보면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빌라델비아를 향해 아무도 닫을 수 없는 하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영원히 닫히지 않는 하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교회의 행위를 보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에는 그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행위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욥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보아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자랑한 것은 아무런 이유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을 자랑하시며 흥분 하셨던 이유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것이 주님이 욥을 기뻐하고 자랑하며 흥분하셨던 이유입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녀들 생일잔치가 끝나면 혹시 지었을지도 모를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을 정도로 자신과 가족의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 애쓰고 힘썼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자랑스러워 하시는 믿음은 행위가 있는 믿음입니다. 행위로 증명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그런 믿음을 보실 때, 그 사람을 칭찬하시며 특별한 복, 정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다 보고 계시며 또 알고 계시며,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그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행위가 있는지를 보십니다. 왜냐하면 행위라는 열매만큼 믿음이라는 나무를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적당히 예수 믿을 수 없나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믿음 뿐만이 아니라 그 믿음을 표현하며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행위를 찾으시며 우리에게서 그런 행위를 발견하실 때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시고 복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 보시고 다 아시는 주님, 바로 그런 주님 앞에 선 빌라델비아 교회였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 보여드린 그들의 아름다운 행위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능력이 적다는 것은 본문의 흐름으로 볼 때, 영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데,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숫적으로 볼 때, 대형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또 교회 안에는 힘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대부분 하층민들이나 노예들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도 아닌 교회, 잘 사는 사람, 유력한 사람들도 없는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또한 유대교인들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던 교회였습니다. 원래 기독교가 초기부터 유대교와 다른 종교로 취급받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처음 얼마간은 기독교도 유대교의 교파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별 어려움이 없었죠. 그런데, 나중에는 이단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추방당했고, 유대교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방패막이가 되어 줄 사람들입니다. 그런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그들 편에 서서 그것을 제지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그렇게 해 줄만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바깥에도 그들의 그런 처지를 헤아려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돈 없고 힘 없는 하층민과 노예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의 원칙으로 삼았으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힘없는 소수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 기죽게 하는 일이며, 힘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것을 이유로 신앙을 타협하거나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고 자랑거리가 되었으며, 엄청난 하늘의 복을 약속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인 자녀가 주는 비싼 선물도 귀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자녀가 힘겹게 마련한 싸구려 선물이 부모들에게는 훨씬 더 귀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지킨 진리와 믿음, 그것이 주님께는 가난한 자녀들에게 받은 힘에 겨운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주님만이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문은 천국의 문입니다. 그렇게 적은 능력을 가지고 믿음과 진리를 지켜낸 그들에게는 천국이 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영원히 닫히지 않을 그런 하늘 문이 그들을 향해 열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그들, 이 든든한 보장을 받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이 말씀처럼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의 모든 슬픔과 서러움이 일순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확실히 바라보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 그 곳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어떤지를 맛 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신앙으로 인한 고생과 손해들을 견디게 해 주는 힘이 됩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은 이 땅에서의 삶을 견디고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어 줍니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나라에 대한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더 기쁘고 더 든든하겠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고 그로 인한 손해와 고생을 감수하는 자들에게 하늘을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8절의 말씀은 그 때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이며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이 확실한 약속, 천국의 약속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