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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6.06. 금요기도회 -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사도행전 64)



행1044to48 -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사도행전6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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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0장 44-48절



우리는 사도행전을 함께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기도를 계속해서 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을 허락해 달라기는 기도였습니다. 물론 성령님을 언제 보내주시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위에 물붓듯이 부어지며, 그 분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신다는 것!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무언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니 이것보다 더 든든하고 은혜로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나 다 성령충만해야 하며, 그것 때문에 모든 성도들에게는 성령충만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요전에 제가 다른 날처럼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크게 회개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은 갑자기 제가 성령충만함을 구하다가 도대체 왜 나는 그것을 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성령충만함을 구하는 제 마음 속에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다 생략해 버리고, 간단하게 표현해서 ‘한 방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가 한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되어보니 한 교회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 정말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과 성령님의 은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는 우리 교회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일에 대한 조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저도 모르게 성령님을 우리 교회의 회복과 변화를 한 방에 이루어 낼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성령충만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성령님께 쓰임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성령님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있었으니 제가 어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을지, 정말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성령충만함을 구할 때, 아마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고, 신기한 능력도 사용하게 되고, 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마구 예수를 믿게 되고, 마음은 항상 천국이 되고… 모든 신앙적인 문제들을 한 번에 끝장내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서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령님을 충만하게 덧입게 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항상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성령충만의 본질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은사라고 부르는 것과 성령충만함을 어느 정도는 구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주어질 수도 있지만 별개로 주어질 수도 있고, 두 가지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풍성했지만 제대로 성령충만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은사들 때문에 오히려 교만해 져서 서로 다투고 교회가 어지러워 졌습니다. 우리가 은사라고 부르는 것의 원래 의미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손님이 우리 집에 왔는데 그냥 빈 손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또 오지는 않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물만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과 은사의 관계입니다. 성령님이 손님이라면 선물은 은사입니다. 성경적으로 은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기능적인 것입니다. 너무 너무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성령충만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은사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충만의 은혜를 주시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계시게 되면 그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뜻에 순종하고 싶어하는, 예전에는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리고 또 그 결단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부어 주시는 것은 이런 성도들을 힘있게 도와주시고 힘을 주셔서 계속해서 그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더욱 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함의 본질과 은사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성령님을 섬기고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내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기뻐하시는 뜻대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미 참된 성령충만의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속에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으로 굉장한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스스로 성령충만하다고 여길 그 때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성령충만함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고 또 성령충만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의무이니까요. 그렇지만 성령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며 그래서 제대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보았듯이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와서 그들에게 복음 전하자 마자 성령님께서 거기서 복음을 듣던 모든 사람들 위에 물 붓듯이 부어지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 동행했던 욥바의 유대인 성도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에게 임하셨던 그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집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에게 성령님이 부어지셨을 때 나타난 증거와 그들에게 나타난 증거가 똑같았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욥바에서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가지를 보고서 고넬료 집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에게 부어졌던 그 성령님께서 부어지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성령충만을 경험할 때마다 동일하게 나타나는 증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성령님을 부어주실 때마다 이런 똑같은 증거들을 보여 주셨을까요? 먼저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금요일날 말씀드린 대로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가 요즘 우리가 ‘방언’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방언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다른 나라 말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외국어라는 뜻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다른 나라 말을 유창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방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그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증거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방언을 하도록 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성령님이 부어지셨다는 것, 그 사람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다는 더 확실한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이것은 특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11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눈 일로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베드로를 심하게 비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더불어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님이 자기들에게 임하신 바로 그 성령님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설득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방언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면 그 말로 그들을 설득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하나님께서 성령님이 부어졌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묶으시기 위해서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방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믿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서 부터는 이 방언의 은사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시기에 특별한 이유로 주신 은사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사의 특징입니다. 은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하다고 해도 은사를 하나도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이 은사라고 부르는 그런 은사는 아무리 성령충만 하다고 해도 하나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우에 교회를 세우시고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상황에 맞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성령님이 부어지신 두 번째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고넬료의 집에 모였던 이방인들이 성령충만 해지자 그들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방언으로 이야기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이었던 것같습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어떤 사람이 진짜로 성령충만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림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일 말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의 여전도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속해 있는 여전도회 였는데요. 서로 모이면 하도 자식 자랑, 손주 자랑이 많아서 그런 자랑이 만들어 내는 문제도 줄일 겸 해서 규칙을 하나 정했습니다. 그런 자랑을 하면 만원씩 벌금을 내리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은 너무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때는 아얘 먼저 벌금을 내놓고 자랑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회원들은 깔깔 거리며 즐거워 했습니다. 웃자고 드린 말씀이지만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자신을 높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인간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도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하나님 보다는 자신을 높이는 일을 즐거워 하고 그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반대로 그만큼 정말로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높이게 될 때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을 때입니다. 그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기뻐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서 하나님이야 말로 정말로 내 영혼이 기뻐할만한 분이고 그래서 정말로 자랑해야 할 분이시라는 것, 그런데 그런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성령님께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그  사람의 속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 가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은사는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충만의 본질이 될 수 없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성령충만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그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져야 할 증거, 아니 가질 수 밖에 없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할 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더욱 더 즐거워 하게 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자신이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이전의 저처럼 그러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부터는 성령님을 특별한 은사나 특별한 일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마시고, 귀찮고 힘드는 일 한 방에 끝내주실 그런 분으로는 더더욱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대신 그 분이 내 속에 들어 오셔서 만들어 내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변화를 생각하시고, 입술과 삶으로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자랑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시고 기대하시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일이 성령님께서 우리 속을 가득 채우셔서 진짜로 하시려는 일이시고 또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요. 


성령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선하고 거룩한 일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속에서 이런 착한 일을 시작한 하나님께서 꼭 이런 성령님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