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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6.13. 금요기도회 - 유대에 있는 사도와 형제들이(사도행전 65)



행1101to18 -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사도행전6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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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1장 01-18절


얼마전 차기 국무총리로 모 교회의 장로가 지명되었습니다. 이 분은 언론인인데요. 요즘 정보가 얼마나 빠른지 이름이 발표되자 마자 이전에 이 분이 썼던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정치적으로 너무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문제가 되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이 분이 큰 교회 장로이고 또 언론인이니 어떤 교회에 가서 강연회를 했는데, 이게 정말 한국 사람이 한 이야기가 맞는가 의심될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강연 속에는 일제 통치도 육이오 전쟁도 하나님의 뜻이며, 일본이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켜 주었고, 위안부 문제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도저히 역사 의식도 상식도 없는 궤변이었죠. 어떤 정치인은 “이 이야기가 한국사람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일본총독부 직원의 이야기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형교회의 장로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글을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부끄럽고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러지 않아도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몇몇 유명한 목사님들의 부적절한 발언 때문에 같은 목회자로서 부끄러워 죽겠는데 왜 자꾸 예수믿는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일만 자꾸 자꾸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는데도,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데도 심지어는 상식에도 한 참 못 미치는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왜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범죄와 부정, 그리고 구설수에 연루되어 있을까요? 단순히 모든 인간이 죄인이니까 그렇다는 대답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더 이상 답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만 대답한다면 결국 아무리 예수 믿어도 예수 믿지 않는 것과 똑같고 심지어는 성도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하고 질이 낮은 삶을 살아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는 성도들을 합리화 하는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 수록 더 정직해져 가야 하고 더 상식적이 되어가야 하고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져 가야 하며,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이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또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이유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빠져 있는 신앙에 대한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으면 저절로 선해지고 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그야 말로 멋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냥 예수 믿는다고 사람은 절대로 거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 믿으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도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게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거의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준 후에, 그들과 함께 며칠을 교제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으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와 욥바의 성도들이 이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함께 식사조차 하지 않으려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으며 그들과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서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으니까요. 게다가 정치적으로 보면 이들의 관계는 지배국의 군인 장교와 피지배국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란 정말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것은 복음과 성령님께서 만들어 낸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도 들려졌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겠습니까? 놀라워 하고 반가워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반응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를 비난하고 꾸중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구절절이 그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욥바에 있을 때, 환상 중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늘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내려왔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집어 먹으라고 하셨던 일,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항변했더니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던 일, 그리고 그 순간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라들이 도착해서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갔고 거기서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처음에 유대인들인 자신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와 똑같이 그들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셨던 일 등… 우리가 사도행전 10장을 통해서 살펴 보았던 모든 일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 났노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나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내가 말한 ‘너희’에 포함된다. 그들도 너희들과 하나다.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의 환상도 보았습니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꾸중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에게만 주시겠다던 성령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임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설명 끝에 이런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그런 즉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니 베드로를 비난하던 유대인들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 일이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다고 해서 그렇게 심하게 비난한 장본인들이 바로 처음으로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여전히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일로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었을까요? 과연 성령충만한 사람들도 이런 분별력 없고 편견에 가득 찬 일을 그것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행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특별한 능력 가운데 거하는 것과 그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 안에서 계속해서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큰 오해를 하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인 성장과 성숙도 한 방으로 끝내 버리려고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그것보다 더 큰 오해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를 오래 믿어도 성숙해지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은혜 받으면 다 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은혜 지상주의라고 부르는데요. 따지고 보면 이런 사고방식과 성령충만함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둘 다 틀린 생각이죠. 신앙에서 한 방에 다 되는 그런 것은 없으니까요. 


성령님의 임재를 가장 강하게 경험한 사람들을 들라면 분명히 오순절 날의 제자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외국어로 된 방언을 말하고 그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고, 또 뛰어나가 하루에 수 천 명씩 회개하게 만들고, 갑자기 광야에 나타나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곧바로 홀연히 사라지고… 역사상 이렇게 강한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거했던 사람들은 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들의 성숙이나 사고방식의 변화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만약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충만함의 경험으로 다 된다면, 하나님께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씩이나 내가 이미 이방인들을 깨끗하게 했다고 설득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을 때,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이방인들 위에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것을 보고서야 그들에게 세례를 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나무랐던 다른 제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만약 오순절의 성령충만의 경험으로 충분했다면 이 제자들은 절대로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인격도 사고방식도 그리고 분별력도 모두 온전해 졌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베드로가 한 일을 칭찬하고 함께 축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던 것,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베드로를 통해 베드로의 경험을 또다시 듣게 하셨던 것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뿌리깊은 사고방식을 깨뜨리려면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일로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생각이 거의 다 새로워지고 바로 잡혀 졌지만 사도행전을 계속 살펴보면 다른 제자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더 변화되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께 한 번 강하게 사로 잡히고, 그 분이 주시는 은사를 경험하며,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되는 ‘성령충만’과,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속 거하시면서 우리의 성품과 가치관, 그리고 사고방식 같은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꿔 가시고 또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성령충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다르게 허락하실까요?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번째 성령충만은 베드로의 표현대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어떤 사람이 그렇게 성령님을 경험하고 그래서 성령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면 그 때부터 성령님과 그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성품, 그리고 생각과 사고방식까지 바꾸시는 일은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어 드려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참 성도가 되는 일, 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그저 예수 믿는 일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한 번 성령충만한 경험을 하거나 심지어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일 가지고도 안됩니다. 참 성도가 되는 일, 성도답게 느끼고 성도답게 생각하며 성도답게 선택하는 일은 그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님 안에 거하면서 그 성령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릴 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새로 빚어 가시도록 온전히 내어드릴 때에아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한 나머지 앞쪽의 성령충만함은 알지만 뒤쪽의 성령충만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일시적인 성령충만의 경험으로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성령지상주의’, ‘은혜지상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니고 통 이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그저 예수 믿으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예수님처럼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점 없는 자가 되어져 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성령님의 손에 맡기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사고방식 까지도 기꺼이 바꿔 나가려고 할 때, 그렇게 하나님께 완전히 설득되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 놓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거룩함은 고사하고 인격도 사고방식도 상식적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나라에 그런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욕을 먹고 그 분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꼭 계속해서 성령충만하시며 성령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서 인격도 생각도 신앙도 더욱 더 성숙하고 온전한 성도들로 빚어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더욱 더 영광스러운 주님 닮은 속 사람으로 빚어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님 안에서 말씀으로 빚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하늘의 별과 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