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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6.17. 새벽예배 -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가니라(창세기 161)


창4928to33 -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창16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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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49장 28-33절




젊은 사람이 죽으면 그냥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돌아가셨다는 말이 죽었다는 말의 높임말로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돌아가셨다는 말은 죽음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음을 그렇게 이해해 왔기 때문에 예로부터 누군가가 충분히 수를 누리고 죽으면 그 사람을 보고 참 잘 돌아갔다고 말했던 것이고 그 말을 어르신들에게 주로 사용하다 보니 그것이 죽었다는 말의 높임말이 된 것 같습니다. 


옛날 가수 중에서 최희준씨는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불렀죠. 이 노래가 참 인기있었던 이유는 제가 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담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첫 소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그런데 이 노래를 들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그저 그 질문만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돌아간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저런 노래는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뭐, 그래도 노래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우리의 인생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인생도 허무한 듯이 생각되지만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은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왔던 곳으로 돌아갈 때는 예전에 왔던 상태 그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우리가 믿는 믿음 안에서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게 살고 또 아무리 원한다고 하더라도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원치 않는 곳, 정말 가기 싫은 곳으로 가죠.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일단 돌아가야 할 곳,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사람들은 왔던 상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곳으로 되돌아 가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았던 모습 모습이 우리 삶과 존재 속에 남긴 흔적들과 열매들을 가지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니고 또 누리고 살아가야 할 영원한 영광의 크기를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정말 은혜롭게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서기 바로 직전에 주님을 믿게 되더라도 우리를 그 곳으로 들여보내 주십니다. 이것은 정말 한 없는 은혜와 자비이지요. 그러나, 그러기 전에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은혜를 덧입은 우리들은 그 은혜와 자비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는 정말 어마 어마한 복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생각하며 또 그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실 영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영광 때문에 엄청난 은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리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에게 그것은 하나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를 우리게 말해 줍니다. 야곱의 마지막은 참 복된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자녀들을 불러 그들을 향한 하나 하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특별한 자녀에 대한 편애가 정말 집착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심했던 야곱이었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정말 잘 보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이가 많았지만 분별력이 흐려지지 않고 사심에 치우치지 않을 정도로 영적으로 분명한 상태였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야곱이 돌아가야 할 곳을 가기 전에 보여준 마지막 모습은 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애석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 이전에 살았던 모습입니다. 정확하게는 애굽으로 내려 오기 전까지의 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그 이전의 그의 모습은 참으로 엉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특별한 보호하심 속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그는 그 알량한 자기 계획과 선하지 못한 지혜, 그리고 형편없는 힘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의 삶에 자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셨지만 정작 자기 야곱 자신의 삶은 부끄럽고 추한 삶, 그러면서도 전혀 평안하지 않고 복되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야곱이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마땅한 반응을 했더라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이 있었더라면 그의 삶은 얼마나 더 우리가 보기에 영광스러웠으며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얼마나 커다란 칭찬을 받았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 앞에선 야곱은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면서 가장 깊은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이미 돌아갈 수 있고 또 꼭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미 꼭 돌아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는데,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곳으로 돌아갈 허락을 받아 놓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은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 이후에 얼마나 크고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될 지 그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날의 후회는 줄이고 그 날의 영광은 크게 만들지 그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 속에는 땅은 있지만 하늘이 없습니다. 땅의 복은 있지만 하늘의 영광은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되기 이전의 야곱은 있지만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저는 이 시대의 목사로서 그렇게 사탄에게 속아서 정말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이 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을 야곱처럼 살아도 언젠가는 주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쉰 코끝의 숨이 더 이상 들이 쉬어지지 않을 때가 오면 그 때는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의 우리의 모습을 바꿀 기회가 없습니다. 항상 그 순간을 마음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서서 웃게 될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투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거룩하게, 신실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주님 이끄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 때, 가장 기뻐하면서 가장 영광스럽게 주님을 만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