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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6.19. 새벽예배 -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창세기 164)


창5022to26 -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창16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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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50장 22-26절




오늘로 창세기 설교가 모두 끝납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에 창조되던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아담의 창조로 부터 시작되어서 요셉의 죽음까지가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아담의 삶과 요셉의 삶을 비교해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살았습니다. 최고로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처음에는 죄성을 지닌 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 타락하고 맙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와도 같은 곳에서 천사와도 같은 존재로 살아갔지만 거기서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 그리고 멸망으로 몰아넣는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손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종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또 다시 옥에 갇히고 맙니다. 망가지고 타락하기로 치면 요셉보다 그렇게 되기 쉬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이미 죄성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상황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담보다 훨씬 불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죄를 짓느니 차라리 고난을 당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20절에서 보았듯이 많은 백성을 살리고 특히 이스라엘을 살리는 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경이 좋지 않아서, 상황이 나빠서 죄를 짓는다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핑계입니다. 어떤 사람은 비교할 바 없이 좋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거듭 거듭 죄를 짓고 자신이 사는 세상을 망가뜨리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야 말로 최악의 상황이나 혹은 유혹 속에서도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인생을 지키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그 둘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철저히 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가 낙원에 살았지만 타락의 길을 갔던 아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정말 지옥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갔던 요셉의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마치 창세기는 우리에게 아담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요셉이 될 것인가를 묻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생겨났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가 백 십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십대 후반에 애굽에 팔려왔다고 해도 최소 90년을 애굽에서 산 것입니다. 요즘 잠시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이 스스로 친일파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수탈한 일을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요셉은 그렇게 되어도 너서 번은 그렇게 되었을 시간을 애굽에서 보낸 셈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전혀 애굽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애굽에서 결혼하고 증손까지 보았지만 애굽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는 애굽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안 요셉은 동족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깁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요셉이 두 번에 걸쳐 이야기한 것은 똑같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돌봐 주실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그들을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붙들고 살았던 것, 그래서 더욱 더 온전히 신뢰하게 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과 또한 언약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가 어렸을 때에 꾸었던 두 개의 꿈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이라 생각했고, 어쨋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애굽에서의 삶은 그가 그 꿈을 하나님의 약속삼아 붙들고 살아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이루실 때까지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끝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그 순간까지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담에게는 그런 믿음이 많이 부족했고 그래서 그는 타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마 어마한 복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온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에게는 선악과만 먹지 않으면 영원히 영생을 누리며 낙원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약속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자신의 왕이 되어 살기를 바랬고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약속 속에 머물렀다면 그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자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붙들려고 하다가 결국 온 세상에 죄와 죽음을 끌어 드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요셉이 살았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그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자신을 책임지시고 보호해 주시고 돌봐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 밖에 유혹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믿음으로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유혹과 죄를 이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그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같이 사느냐 아니면 요셉같이 사느냐 하는 것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실 때가지 우리를 돌보시고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여러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라고 확신있게 외쳤던 요셉의 외침이 사라지지 말게 하시고, 그것이 이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도 더 크게 울려 퍼지는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이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서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을 목격하며 주님의 신실하신 돌보심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