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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6.20 금요기도회 - 환란으로 말미암아(사도행전 66)




행1119to26 - 환란으로 말미암아(사도행전6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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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1장 19-26절




이렇게 아무런 방해와 어려움 없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커다란 복이고 은혜인지 모릅니다. 한 때는 우리 나라에서도 단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어야 하던 때도 있었고, 지금도 북한은 물론이고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가족의 방해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 안타깝죠. 그렇게 보면 가족의 방해나 환경이 주는 고민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고통만 보지 않고 그런 것들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 내는 열매를 보면 장애와 방해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편안함이 신앙이나 복음전파에 플러스만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자신만 보더라도 분명히 편안하고 넉넉했을 때 보다는 뭔가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의 신앙이 훨씬 더 뜨겁고 깊이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 한 번이라도 더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에게 정말 좋은 것만 주고 싶고 평안한 시절만 살아가게 해 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하실 능력도 있으시고 말입니다. 그러나, 넉넉하고 편안하게만 놓아두면 이론적으로는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결과는 거의 항상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신앙은 미지근해 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변질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우리를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지만 항상 우리가 바라는 그런 모양으로 우리를 대하실 수가 없고, 교회를 다루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야 더 성숙하고 단단한 믿음이 생기니까요.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런 어려움들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우리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성경이 ‘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때로는 적극적으로 성도와 교회의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와 성도는 언제나 이런 핍박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견고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어 가시고 또 믿음의 사람들을 더욱 유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점점 기독교와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습니다. 그 박해에 불을 당긴 것은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그 일 때문에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지고 공공연해 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과 같은 회당과 성전에서 모여 신앙생활을 하던 예루살렘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져 갔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그리로 갔던 유대인 성도들은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저 예수 믿는다고 마음과 생각이 모든 면에서 성숙하게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더 많이 배우고 깨달아야 하며, 또 그렇게 배우고 깨달은 바에 대해서 순종하는 훈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 배우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아무튼 복음이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지 않고서 그저 예루살렘에만 주저앉아 있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박해를 주셔서 그들을 흩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박해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교 당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한 악행을 그냥 악행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도들의 믿음을 훈련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핍박이 복음전파의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바른 분별력과 소명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 때문에 갑자기 평생 살아가던 터전을 떠나가야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고, 그것 때문에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충분히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회의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고 올바른 선택을 했는데 어려움이 생기면 거의 자동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를 믿고 박해를 받아 그렇게 고향을 등져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예수의 이름을 거침 없이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소명과 핍박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핍박과 망명은 그저 자신들이 소명을 행해야 할 자리가 바뀌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핍박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증거로 여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하는 소명의 랜즈를 통해서 그 일을 보게 되니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은 소명을 따라 살아가기에는 훨씬 더 좋은 그런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여기 저기 흩어져 간 예루살렘 성도들은 자기 동족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직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일은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구브로와 구레네의 유대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안디옥으로 가서 거기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미 오랫동안 이방인들과 어울려 살아왔던 터라 그들에 대한 편견이 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서는 수많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방인의 복음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편견, 그리고 아직은 덜 된 준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충분히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만 해도 제가 생각하는 목사다운 삶을 살면서 주신 소명에 100퍼센트 순종하고 있지는 못하니까요. 온전히 순종하며 소명을 따라 행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제대로 감당할 준비가 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핍박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비록 아직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정도까지 이방인들을 향해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았고,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흩어져 간 그 곳에서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비록 그들의 순종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결국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떻고 형편이 어떻든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할수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내가 감당한 일이 매개가 되고 시작점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렇게 안디옥에서 복음이 불일듯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나바라는 사람을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한 터라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바나바를 보냈던 것입니다. 안디옥에 온 바나바는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이방인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방인 성도들에게 주는 메세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사역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바나바 혼자서는 그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양육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고향 다소에 가 있는 바울이 생각났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협력으로 안디옥에서는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안디옥의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갔고, 또 더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26절을 보면 그 모든 일의 열매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물론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우리 말의 ‘예수쟁이’라는 말처럼 그다지 긍정적인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부르는 정해진 이름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두 사람의 사역으로 인해 드디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안디옥에서는 신앙적으로 볼 때는 가장 아름답고 은혜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면 이렇게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일은 굉장히 좋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커다란 핍박이 그 시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핍박이라는 좋지 않은 씨앗을 좋은 씨앗으로 변화시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핍박에 대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성숙한 반응이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 핍박 때문에 도망치면서 절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했다면 일은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구브로와 구레네 그리고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파되는데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며, 그랬다면 바나바가 거기까지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거기서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 함께 동역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안디옥의 아름다운 복음의 부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언제나 즐겨 사용하시는 재료와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과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드리는 믿음의 순종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별로 위대하지도 않고 별로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위대해지고 특별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여건 때문에 좌절과 불신앙에 빠지지 않고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도로 살아가는 여러분 한 사람의 작은 몸짓을 스스로 업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족하고 불완전 해도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으로 주신 소명에 최선을 다해서 응답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그 일에 영광스럽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예수 믿는 일에 대해서 굉장히 적대적인 환경과 부정적인 시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이니까요. 이것은 분명 우리 믿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저질러 놓은 일들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좌절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저주스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큰 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일터에서, 이웃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면 됩니다. 좋은 씨앗을 심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대하면서 있는 그 곳에서 충성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위한 좋은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