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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6.25. - 새벽예배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출애굽기 2)


출0108to14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출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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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1장 8-1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애굽으로 온 이스라엘은 거기서 300년 남짓한 세월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번성해서 70명에서 거의 300만명이 되었고 매우 강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은혜였고 너무 너무 좋은 일이었지만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애굽을 살리고 또 여러 민족들을 살렸던 요셉에 대한 기록은 희미해져 갔고 드디어 요셉은 애굽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고 그러한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는 그런 사람이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라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은인의 가족이 아니라 그저 현실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이렇게 강대해져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운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이스라엘을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보았습니다. 언제든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 편에 붙어서 자신들을 해꼬지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스라엘이 크게 번성하여 강한 민족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큰 위협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왕은 애굽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감독하는 사람들을 세우고 거대한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을 짓기 위해서 굉장히 힘겨운 노역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힘이 들어서 쇠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더욱 더 번성해 갔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더 힘든 노동으로 이스라엘을 더 심하게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흙 이기기와 별돌 굽기 그리고 농사 같은 일들을 굉장히 과하게 시켰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크고 강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을 그대로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커다란 오해와 핍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날 갑자기 불쑥 끼어든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에 의하면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히 알고 계셨던 일이었습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핍박한 일을 그저 현실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 갈 때가 그만큼 더 가까워 졌다는 뜻이 됩니다. 상황은 자체는 힘들지만 그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희망적이고 기쁜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정말 잘 합니다.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선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너무 은혜롭고 복되죠.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뀝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상황이 힘들어 집니다. 그냥 상황만 보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는 분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그 때 예전에 보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고 결론이 달라집니다. 핍박과 손해는 여전히 힘들고 어렵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주고, 그래서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 핍박이 즐겁고 그 손해가 은혜롭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복을 받을 때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쉽게 확인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러한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오면 그것을 똑같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그게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이미 성경에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경험하는 손해와 어려움들을 그저 현실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불편함들은 그래도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돕기 위해서 성경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1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 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 나가니…” 어떻게 학대를 받을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해 주시겠다던 그 약속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지켜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부정적인 상황 자체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대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시각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믿음을 지키며 성숙시켜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와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든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끼어들 수 있고 그 왕은 언제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손해를 줌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 성도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을 알고 계셨고, 또 그럴 것이라고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의 인생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약속을 수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지켜 오셨고 또 지금까지 지키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분을 붙들고 살아가는 한, 그래서 그 왕은 절대로 교회와 우리의 인생을 뒤흔들지 못합니다. 항상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교회와 여러분 개인의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하루의 삶 속에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