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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6.27. 금요기도회 -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 67)



행1119to26 -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6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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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1장 19-30절




지난 금요일에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된 것은 놀랍게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디옥에서 였습니다. 특히 이 별명은 예수믿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별명이 덧붙여 지는 것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 별명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디옥의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아주 분명한 특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특징은 이들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또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 차이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믿는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보기에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은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게 마련이고 또한 스스로도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는 자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달라짐이 자신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자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지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고 합니다. 생활의 정도나 모습, 그리고 인생의 목적이나 찾으려는 즐거움 등… 모든 것들을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춰 가려고 애를 씁니다.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그들과 무리 없이 섞이지 못하면 그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고 속상해 합니다. 또 심지어는 주눅이 들고 열등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성도 답지 못한 것이나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할 부분에서 다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안타까움이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 때문에 생겨난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더 이상 우리를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우리의 별명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세상은 우리가 자신들과 똑같아 지는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히 성도들이 자신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불편해 합니다. 때로는 핍박하고 괴롭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자신들과 다를 때만 우리를 인정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를 향하여 기꺼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 줍니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달랐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본문이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쩌면 단편적이고 희미한 증거들만으로도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영광스러운 별명을 되찾기 위한 단서를 발견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변화와 새로워짐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선 2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니라” 믿고 주께 돌아온 것은 안디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주께 돌아온 것이 그들의 결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24절을 보면 안디옥에서의 바나바의 사역의 결과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지더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이런 변화가 시작된 것이 그들의 결단 덕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신에게 덧붙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시작하시고 은혜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순종이 없으면 아름다운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일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자꾸 신앙을 실천의 문제로 끌고 가게 됩니다. 신앙을 은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기 의지와 결단의 문제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신앙에 자기 의가 끼어들고 은혜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변하고 새로워지는 일에 있어서는 별반 진전을 보이지 못합니다. 변화는 은혜가 만들어 내는 것인데 더 이상 은혜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가 굉장히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기뻐했을까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였을까요? 교회가 대단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어서 였을까요? 바나바가 기뻐했던 이유는 이제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안디옥의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이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고 정말 평판이 자자했던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가 이제 갓 예수를 믿은 성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다니 이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결해 보면 바로 이것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그렇게 아름다운 변화라는 열매를 일구어 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던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의 분명한 은혜의 역사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대부분 경험하셔서 아시겠지만 이런 풍성한 은혜는 절대로 쉽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은혜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죠. 그러면 그 은혜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많이 새로워진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로도 은혜를 받기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마음도 행동도 이전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성도들은 영적인 좌절감에 빠집니다. ‘예수 믿어도, 그리고 은혜 받아도 안되더라. 사람은 변하지 않더라’라는 무기력함에 빠집니다.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이전에 받았던 은혜와 처음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변화가 가짜가 아니었나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경험이 이렇게 반복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처음에 받았던 은혜도 가짜가 아닙니다. 그 때 일어났던 변화도 가짜가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은혜 받아도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여겨지고 또 믿어지며,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더 이상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시작된 변화를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를 지켜내고 그 은혜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은혜 안에서 변화되는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확실하게 변화되는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간혹 개과천선해서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던 도둑이나 폭력배가 또 다시 그 길로 되돌아 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충분히 변하기 전에 너무 일찍 마음을 놓았고 은혜에 의지하는 일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안디옥의 성도들을 이전과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그들 속에서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하고 능력 있게 일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우리 속에는 얼마나 놀라운 주님 주시는 기쁨이 넘쳐 흐를까요? 그리고 우리는 또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만 의지하면 우리는 절대로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의지한다면, 은혜를 간절히 소망하고 그렇게 얻은 은혜를 단단히 붙들기 위해서 힘쓰고 애쓴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변해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준 안디옥의 성도들, 그렇게 이미 은혜 안에서 아름답게 변해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나바가 주었던 권면과 가르침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꼭 마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가장 치명적인 마음상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덕입니다. 이유야 어쨋건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복이 심해서는 안됩니다. 이 변덕을 처리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신앙은 참되게 성장하기가 힘듭니다. 그 변덕 때문에 은혜를 지켜내지 못하고 그 변덕 때문에 믿음의 터가 다져지고 변화가 자리를 잡을 틈이 생겨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마음이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고 쉽게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이렇다할 신앙적인 성장이 없다고 여긴다면 대개 그것은 이 마음의 문제 때문입니다. 마음의 변덕을 그대로 내버려 둔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 비로소 굳건해 질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목적이 없는 사람이 굳건한 의지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서 굳건한 마음을 가지려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꼭 붙들어야 할 중요한 것이 없으면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이리 저리 흔들리다가 영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변함없는 신앙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합됩니다.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받는 모든 좋은 것들은 이렇게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은혜이든 평강이든, 변화나 견고함이든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고 또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하나됨이 느슨해 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모든 좋은 것들의 공급이 약해지고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평안을 모르고, 믿음의 능력도 누리지 못하는 것,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져 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다 여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일에 실패 했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히 주님과 함께 거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차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지만, 그렇지 않으면 열매가 조금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열매가 풍성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열매맺는 일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명조차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달라지고 그만큼 새로워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를 잘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눈에 보일 정도로 풍성하게 임했을 때, 그것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일에 마음과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해 졌으며 그 은혜 안에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변화되어져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은혜는 신앙생활의 전부이고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만약 은혜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저 그런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떼를 쓰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을 지키고 더 풍성하게 하는 일에 마음을 정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일을 그 어떤 일 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절대로 그 일에 있어서 손해 보는 선택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은혜를 붙들고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아름다운 그 분의 성품을 덧입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만큼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꼭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꼭 지켜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든든하게 예수님을 붙들고 은혜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