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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6.27. 새벽예배 -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출애굽기 4)



출0201to10 -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출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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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2장 1-10절




바로의 노골적인 히브리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 전체가 멸절될 수 있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수없는 아이들이 나일강에 던져져 악어와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분노와 절망감이 어떠했을지는 우리로서는 다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였겠지요. 그러나, 애굽 땅 한 구석에서는 그러한 바로에게 순복하지 않고서 도저히 자신이 낳은 아들을 내놓지 못해서 석 달 동안 숨겨 기른 부모와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커져버린 울음 소리 때문에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어버린 아이를 이 가족은 그냥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저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갈대상자를 물이 세지 않게 만들어 그 안에 아이를 넣어 그냥 나일강에 띄워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 아이의 누나는 동생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그 갈대상자를 갈대 사이에 놓아두고는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로 애굽의 한 귀족 여인이 목욕을 하러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목욕을 하는 동안에 시녀들은 그 주변을 살폈습니다. 그 아이의 누나는 얼마나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자기 동생이 담긴 갈대상자를 발견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까요? 너무나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그 여인이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는 시녀를 시켜서 자기에게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열고 보니 그 안에 아기가 있었고 그 아기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아버지가 내린 그 명령 때문에 이렇게 자기 아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귀족 여인은 바로 바로의 딸이었습니다. 


순간 누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애굽의 공주에게로 뛰어간 누나는 유모를 구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애굽의 공주는 흔쾌히 승락하면서 그 일에 대한 삯까지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아기는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애굽 공주의 경제적인 지원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기는 젖을 떼게 되었고 그래서 여인은 자기 아들을 공주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공주는 그 아기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궁에서 양육하기로 하면서 그 아기의 이름을 모세라고 붙여 줍니다. 자신이 그 아기를 건져 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우리가 만약 이 이야기를 처음 성경에서 읽는다면 도대체 이 아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기 뿐만이 아니라 그 가족들도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그저 애굽 왕의 명령이 어떤 아픔과 슬픔을 만들어 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하나의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끝은 해피엔딩이어서 그래도 아프고 슬프기만한 내용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이 한 번도 나오지 않으십니다. 그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저 한 가족의 일화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작은 일화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잔인하고 슬프고 또 소망적인 이야기 뒤에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바로는 새로 태어나는 모든 히브리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 한 구석에서 자녀와 동생을 살리고 보호하려는 한 가족의 헌신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동생을 살리려는 한 소녀의 지혜와 그 지혜를 통해 그 아기가 자기 엄마의 품에서 양육되는 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기 딸이 자기의 명령과는 정반대로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아이를 양자로 삼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자기 궁전에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낼 자로 자라나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로의 결정은 자신이 그렇게도 피하려고 했고 또 싫어했던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마치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우연과 우연으로 이어지다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상적이고 밋밋한 일들, 그리고 우연처럼 보여지는 모든 일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 볼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교회와 이 세상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고 구하면서 대개는 정말 누구나 다 알아차릴 수 있고 또 볼 수 있을만한 놀랍고 신기한 기적을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그렇게 일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를 놀랍게 드러내시면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 하나님께서는 무대의 전면에 잘 나서지 않으십니다.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숨어 계십니다. 그렇지만 실은 가장 열심히 일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일 속에는 하나님이 절대로 안 계신다고 생각하는 좋지 않은 일들, 그리고 너무도 평범하고 밋밋해서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지 않다고 여기지는 그런 일상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뒤에서 인생과 이 세상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을 거스르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과 시도들을 거꾸로 뒤집어 엎으시면서 움직여 가십니다. 바로가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빠져 죽게 만들려고 했고, 그래서 히브리인들을 멸절시키려고 했던 그 나일 강에서 나중에 그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모세가 건져 올려질 줄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볼 때 전율마저 느껴지곤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저 흘러가고 있는 우연한 일들처럼 여겨지는 일상들 속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같아 보이는 좋지 않은 일들이나 슬프고 아픈 일들 뒤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그 곳으로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인간의 모든 악하고 간교한 시도들을 거꾸로 뒤집으면서 말입니다. 때로 세상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또 일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때는 나일에서 건져 올려진 한 아기가 온 이스라엘을 건질 모세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심지어는 그 모세 자신마저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면서 그 뒤에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만큼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모세의 가족처럼, 바로의 딸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마음과 생각을 무시하지 말고 거기에 최선을 다해서 응답할 때,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사탄과 악인들의 악한 시도와 계략을 뒤집으시는 도구가 되고, 또 하나님의 뜻이 이기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고 또 믿으면서 선한 마음과 생각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