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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6.29. 주일오전 -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기 2)



룻0106to18 -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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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룻기 1장 6-18절



사랑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살자는 말에 토를 다는 사람도 그럴 것이 분명하구요. 그것은 사랑이 선하고 꼭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만큼은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무게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단순한 감정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커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해가는 이유는 대중문화, 특히 드라나마 영화 같은 대중 매체의 영향이 아주 큰 것 같습니다. 대중매체가 그리고 있는 사랑의 모습이 다분히 인스턴트 음식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자주 자주 그런 모습의 사랑을 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것을 쉽게 변할 수 있고 또 변해도 괜찮은 것, 감정에 따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아침 그 감정이 사그라들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곧바로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랑을 느낌이나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이런 경향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제 사랑에 대한 그런 사고방식은 점점 더 일반적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은 더 이상 책임이나 진지함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가볍고 즉흥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이런 생각이 성도들의 삶과 교회 안에도 그대로 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것이 별로 심각하지 않은 문제 같지만 실제로 이런 현상 때문에 이제는 그 어디서도 참된 사랑을 경험하기가 힘들어 졌고, 그래서 점점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도의 가정에서도,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참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성경은 참된 사랑을 성도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요 표지이며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참된 사랑이 없어져 버린 것에 대해서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시급한 것 한 가지는 바로 사랑에 대한 바른 개념을 되찾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과 능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과 교회,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지도 모릅니다.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 지방으로 이사한 지 10년, 그 동안 나오미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더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아들도 자식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 가정 안에는 세 명의 미망인만이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허망하고 슬프고 정말 대책 없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나오미에게도 최소한의 살 길이 열린 듯이 보였습니다. 고향 땅을 휩쓸던 가뭄이 끝나고 드디어 양식을 추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나오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같이 가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며느리들이 따라 나섰고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겠지요. 사실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벌써 나이가 많은 자신으로써는 젊은 며느리 둘과 함께 돌아가면 훨씬 더 유리했을 것입니다. 두 며느리의 섬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고향이 가까워 오자 그렇게 하는 것은 젊은 며느리들에게 해서는 안될 몹쓸 짓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축복하고서 먼저 입맞춤으로 작별인사까지 건넵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가장 힘들고 껄끄러운 관계가 무슨 관계일까요? 아마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 아닐까요? 만약 이 관계가 전혀 불편하지 않으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다면 참 복받은 것입니다. 특히 이 둘 사이의 관계 때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시는 남성들은 정말 정말 복된 인생을 사시는 것입니다. 한참 된 일이지만, 제가 한 번은 저희 어머니와 집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작은 오해 때문에 정말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희 어머니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고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간격이 좁혀 지질 않든지…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그 때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묘한 것이구나. 이 정도 오해만 있어도 이렇게 힘든데 둘 사이에 큰 트러블이 있는 남자들은 정말 고단하게 살겠구나. 난 그 동안 참 복되게 살았구나.’하고 말입니다. 제가 이 자리를 빌어서 이 땅의 모든 시어머니들과 우주의 모든 며느리들에게 부탁드리옵니다. 제발들 사이 좋게 지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지내주시옵소서. 어차피 이 세상에 내 맘에 꼭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속으로 난 내 자식도 미울 때가 있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도 힘들 때가 있는데 어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내 마음에 흡족할 수 있겠사옵나이까? 제발 그 야무진 꿈들 다 내려 놓으시고 인류평화를 위해서 크게 이바지 해 주시옵소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편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오미와 두 며느리 사이의 대화는 얼마나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대화입니까? 이 땅의 모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대화가 이 분들의 대화와 같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며느리가 통곡하면서 들려준 정말 감동적이고 애틋한 대답을 들었지만 나오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이제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두 사람을 설득합니다. 당시에는 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대를 이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요. 첫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이 풍습과 관계된 이야기였습니다. 첫째,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아들을 낳을 능력이 없다. 둘째, 그럴 능력이 있고 그래서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아이가 다 자라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너희가 남편 없이 지내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마지막 셋째, 나는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너희를 볼 때마다 나의 이런 처지가 생각나서 더 괴롭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나 너희가 너희 집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 였습니다. 물론 세 번째 이유는 며느리들을 꼭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말입니다. 나오미가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정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거나 혹은 며느리를 어떤 소유물처럼 생각했던 당시의 사고방식을 따라 생각했다면 나오미는 절대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어떻게 이렇게 며느리들의 유익만 헤아리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기를 따라가면 안되는 이유를 말할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다”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두 며느리는 이미 며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딸들이었습니다. 진심으로 말이지요. 제가 예전에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교회의 권사님으로부터 상담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가지고 계셨던 고민은 며느리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이야기를 다 들어보니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딸로 대하고 있는데, 며느리는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도 자신을 불편해 한다. 나를 자기 엄마처럼 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발견한 것은 그 분이 자신의 말처럼 진짜로 며느리가 자신을 엄마처럼 대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스스로도 며느리를 딸처럼 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못된 제가 조금은 장난스럽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 권사님은 며느님이 권사님을 엄마처럼 대해 주기를 원하시죠? 그런데, 만약 정말로 며느님이 권사님을 자기 엄마처럼 대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딸처럼 소리도 지르고 막 뭐라고 하기도 하고, 집에 오면 디비져 잠이나 자고 냉장고 뒤져서 막 뭐 내먹고 바리 바리 싸서 가지고 가면서도 “엄마, 나 가요!”라고 휙 사라져 버리면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막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안되죠, 목사님. 그러면 절대로 안되죠.” 그 웃음을 통해 그 권사님은 스스로 대답을 얻으신 듯 했습니다. 


시어머니들은 마음은 진심으로 며느리들과 딸처럼 지내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짜로 의미하는 바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말 딸처럼 지내기를 원한다면 둘 중의 한 가지는 꼭 되어야 합니다. 첫째 며느리가 나를 자기 친엄마처럼 편하게 대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삼천갑자의 내공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 가운데 토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그만큼 진실로 진실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며느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안되면 며느리하고 딸처럼 지내겠다는 그 야무진 소원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권면합니다. 제발 며느리하고 딸처럼 지내려고 하지 마시고 그저 정상적인 고부간으로만, 그저 나하고 같은 입장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같은 여인으로만 바라보시며 그렇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며느리들도 시어머니를 나보다 먼저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간 그런 여인으로 생각하시면서 그렇게 시어머니들을 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와 며느리들 사이 같은 관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세번씩이나 자신들을 딸이라고 부르면서 간곡하게 만류하자 두 며느리는 또 다시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두 며느리가 내린 결론은 서로 달랐습니다.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하자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오히려 나오미에게 더 강하게 매달렸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 둘 중에 룻은 칭찬하지만 오르바는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오르바를 비난하기 쉬운 것은 그 반대의 선택을 한 룻의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룻이 옳다면 오르바는 그릇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오르바 또한 어머니의 진심을 헤아렸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바라는 나오미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로 나오미가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이 나오미에게는 마음의 짐이 되고 괴로움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이미 거기까지 마음을 다해서 시어머니를 쫓아 왔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오르바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 또한 이미 시어머니를 충분히 사랑한 것입니다. 


룻이 자신을 계속해서 따라오자 나오미는 또 다시 룻을 만류합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은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정말 대단합니다. 자신에게 저주의 맹세까지 걸면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더 이상 룻을 말리지 못하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오르바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이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오미를 따라가려고 했는지 참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룻이 나오미를 사랑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두 번의 통곡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지요. 그렇지만 룻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단순히 시어머니를 향한 인간적인 사랑 하나만으로 그렇게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만류할 때, 오르바와 룻이 했던 두 번의 대답 속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머니의 백성,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들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독특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런 백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시어머니의 백성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두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던 가정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으로 시집 온 여인들이었습니다. 당시 결혼관계는 곧 신앙을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여인은 시집을 오면서 섬기는 신을 바꾸었겠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이것이 형식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불교집안 에서 살던 처자가 기독교 집안으로 시집 오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함께 교회에 나가 주는 것 정도였겠지요. 그런데 이들이 그러면서 시어머니와 남편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나오미와 자신의 남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자신들을 대해주는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이한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두 아들들은 이방인인 두 여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언약적인 사랑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축복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기 선대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그저 잘 대해 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여기 사용된 말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중요한 말입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 될 수 있는대로 원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오늘은 한 단어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헤세드(חטד)’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 말 성경에서 인애나 혹은 인자라고 번역되는 말인데요. 느낌을 살려서 번역하면 이것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베푸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 말도 이 단어를 한 단어로 표현할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을만큼 이 단어는 아주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말하는 사랑이 단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깨뜨릴 수 없는 언약이라는 단단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깨지지 않는 이유는 언약이 깨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오미의 말을 원래대로 적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에게 헤세드를 가지고 사랑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헤세드로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며…” 이렇게 보면 이 두 여인은 이미 헤세드가 무엇인지 알고 그 헤세드로 남편들과 시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헤세드와 그 헤세드 안에서 살아가는 자기 가족들의 헤세드를 경험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게 보면 이 두 사람은 이미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르바는 애석하게도 원래 섬기던 신에게로, 그리고 그 헤세드를 모르는 자기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나오미를 향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나오미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헤세드 안에 거하는 것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속에서 발견한 헤세드, 그리고 그 어머니를 통해 알게된 하나님의 헤세드를 포기할 수가 없었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김병년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10년동안 거의 식물인간 상태에 계시는 사모님을 사랑하며 간병했던 힘겹지만 행복하게 사셨던 경험을 책으로 내셔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계신 분이신데요. 알고 보니 어제 저를 찾아왔던 대학시절 후배가 그 분이 목회하시는 교회를 개척시절부터 함께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처음에 젊은 부부 다섯과 청년 둘 이렇게 열 두 명과 그 목사님이 함께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게 교회를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목사님 사모님이 셋째 아이를 출산한 지 3일만에 갑작스런 뇌출혈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성도와 교회를 생각해서 그 교회의 목회를 그만두려고 하셨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을 극구 말리면서 그저 강단에만 서 달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 바로 그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개척교회의 목사 사모가 얼마나 역할이 큽니까? 게다가 목사까지 사모의 간병에 매달려 있으니 목회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 나머지 공간을 모두 그 교회 성도들이 서로 수고하며 채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10년을 버텨 왔답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이 교회가 선교사 한 분을 터키로 파송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분이 거기서 큰 병을 얻으셔서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 분의 장례에 필요한 모든 것도 교회가 전부 감당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감동적인데, 저를 더욱 더 감동하게 만든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에게는 노모가 한 분 계시는데, 이 분이 치매를 앓다가 큰 병을 얻으셔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셨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을 그 교회가 알게 되었고, 이제 그 분의 병원비까지 다 감당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건물 임대료를 한 달에 80만원씩 내는 100명 조금 넘는 교회인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베푸시는 필요 이상의 헤픈 사랑이며 그 사랑을 받아본 성도들만이 알 수 있고 또 베풀 수 있는 사랑입니다. 헤세드라는 사랑은 내가 무엇을 얻을까 하는 이기심이나 일시적인 감정에 기초를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깨질 수 없는 약속 위에 세워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뜨겁거나 애틋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레는 감정이 없을 때도 있고 때로는 힘겹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죠. 심지어는 바보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그만두거나 깨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끼리도 그 헤세드 안에서 서로가 하나이며 그래서 서로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룻기를 읽으면서 행복해 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하나님께서 이 룻기를 통해서 가장 어두운 시기에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실 수 있었던 것은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이 헤세드라는 헤프고 바보같지만 쉽사리 깨지지 않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단순한 사랑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변덕스러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깨지지 않는 언약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어리석고 헤픈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기 쉬운 감정이나 이기심 위에 세워진 그런 값싸고 가벼운 사랑이 아니라 이 헤세드가 우리들 사이에 있어야 할 참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세상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랑에 맞춰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두 며느리가 나오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주고 또 누리게 해 줄 수 있는 귀한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사랑도 달라야 합니다. 성도가 가정에서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은 달라야 하고 교회에서 지체된 성도를 사랑하는 사랑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언약 안에서 하나님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묶인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정에서도 헤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또 형제가 형제를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서로를 바로 그 헤세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아는 사랑이라고는 바보같고 헤프지만 깨지지 않는 헤세드라는 사랑 하나 밖에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참 사랑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진 이 시대, 사랑에 있어서는 마치 사사들의 시대처럼 어둡기만 한 이 시대에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또 하나의 룻기를 기록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헤세드를 누리며 그 헤세드로 가득 채워진 곳으로 세워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옆에 계신 분과 손을 잡고서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먼저 따라 해 보겠습니다. “저 이제 헤프게 사랑할랍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주세요.” 이제 서로에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서로를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1. 먼저 내가 하나님의 헤세드를 깊이 깨닫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내가 그 헤픈 사랑으로 살게 해 달라고. 
  2. 내 앞에 있는 형제와 자매가 헤세드를 누리며 헤세드를 보여줄 수 있는 복되고 사랑 넘치는 성도로 살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