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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7.01. 새벽예배 - 모세가 한 번은(출애굽기 5)



출0211to15 - 모세가 한 번은(출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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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2장 11-15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주의 깊게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언제가 하나님께서 움직이기를 원하시는 때인가 하는 것과 또 그렇게 하나님의 때에 맞춰 움직일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짧은 사역경험으로만 보아도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잘 생각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실제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만 감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빛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고 또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또한 예기치 못한 부작용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가 중요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에 속해 있다면 결과를 전혀 무시할 수 없고 또한 그 조직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이런 모습이 교회를 움직여 갈 때도, 그리고 성도가 자신의 인생을 경영해 갈 때도 그대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닮아가고 있으며, 성도는 성도됨을 잃어버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별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과 위주의 생각을 하면 결국 과정은 그 중요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타이밍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얄팍한 지혜와 인간적인 수단으로 만들어 낸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하시지만 그것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런 일들이 만들어 낸 교회와 우리 삶 속에 끼어든 부산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바로의 궁 안에서의 모세의 성장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냥 다 자란 모세가 저지른 사건으로 훌쩍 뛰어 넘어가 버립니다. 하루는 모세가 자신의 동족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모세는 어려서 부터 바로의 궁에서 양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애굽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을 계속해서 자기 동족과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인이 가장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더라도 절대로 이 세상과 똑같아지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구이며 어디 소속인지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힘든 노동을 하는 동족을 바라보는 모세는 아마도 마음이 굉장히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의 눈에 더 이상 그를 참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 또 하나 발생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무겁게 쳐진 어깨 위로 내니 꽂히는 감독관의 채찍을 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 감독을 죽여 모래 속에 파묻어 버립니다. 


그 다음날 모세는 또 다시 동족들이  일하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족들끼리 다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족이 애굽 사람들에게 맞는 것도 보기 힘든데,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돌봐 주어야 할 사람들 사이에서 애굽 사람들과 동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또 재현되고 있으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죠. 그래서 모세는 그들 사이에 끼어듭니다. 그리고 왜 동족을 그렇게 괴롭히느냐고 그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되돌아온 대답은 상상할 수 없던 대답이었고 결국 모세는 그것 때문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자기 동족을 두들겨 패던 사람이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오히려 모세를 비난하면서 협박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두려워 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은 결국 바로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그러지 않아도 눈엣 가시같았던 모세를 죽이려고 모세를 찾았고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버리고 맙니다. 


모세의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모세는 정말로 동족을 사랑했고 그래서 동족들을 구하고 돕기 위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그런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그가 그렇게 나선 타이밍이 잘못되었고 둘째는 그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이 잘못 되었습니다. 아직 모세는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이고, 하나님께서 움직이기를 원하신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임의대로 아무도 몰래 사람을 쳐 죽이는 일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때도 그렇고 방법도 그렇고 모두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광야로 도망치는 살인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형제들이 애굽의 압제 아래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렇게 자기 형제들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들을 ‘쳤다’고 말하는데, 이 말들은 나중에 출애굽기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셨고, 그래서 애굽과 바로를 치셨다고 말할 때, 그대로 반복되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모세가 그렇게 한 마음과 행동이 자기 백성을 구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행동과 마음과 똑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 때문에 모세는 비겁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왜 동족을 괴롭히느냐고 만류하는 모세에게 그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는 사실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모세 스스로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이 모세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결국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세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예표가 될 정도로 전무 후무한 훌륭한 지도자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언급한 적도 없고 임명장을 주신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자기 동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와 다스리는 자로 자처하다 보니, 비록 그 마음과 동기는 참 훌륭하지만 하나님은 무론이고 동족들까지 인정해 주지 않는, 그저 말썽만 부리는 철부지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살인이라는 죄까지 저지르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열심과 뜨거움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며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할 수 있는 분별력과 겸손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갖춰지지 않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의 일을 망가뜨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실 일이 분명해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면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먼저 분명한 때와 방법을 분별한 후에, 거기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기도가 필요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 새벽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는 말씀도 있고 또 기도도 있으니까요. 이 시간을 우리의 개인적인 소원을 아뢰는 시간으로도 사용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며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거기 순종할 수 있는 예민하고 겸손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새벽 시간을 그렇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묻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하나님의 착하고 유익한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